# 레몬 쉬폰(Lemon Chiffon:연하고 밝은 노란색)
진주에 들어서니 남강은 예전과 같은 속도로 흐르고 있었다. 강물은 세월이 흘러도 그 물결 그대로였다. 남강 북쪽 구도시는 별로 변한 게 없었다. 그렇지만 남강 다리를 건너니 앞에 떡하니 빌딩 숲이 다가선다. 어색하다. 오만 가지 생각을 안고 칠암동으로 향했다.
당장 진주 바닥에서 누구를 만난다 해도, 꼿꼿하게 대할 자신이 생겼다. 나를 알아볼 사람도 없을 것이다. 나는 이미 그때의 찌질이 청희가 아니다. 진주에서 내가 편히 숨을 쉬고, 칠암동에서 하늘을 맘껏 쳐다볼 수 있는 근자감이 생겼다. 나이빨인가? 세월빨인가? 힘들게 여겼던 것들이 이젠 허깨비처럼 별 것 아닌 듯하다. 까짓것, 누구를 눈앞에 마주한다 해도 두려울 게 없다. 다만 어린 시절의 청희가 안쓰러울 뿐이다. 그때의 나에게 조용히 손을 내밀어 본다. 내속에서 울고 있는 그 아이와 손잡고 칠암동, 그 옛집으로 향했다.
출장 업무는 이미 내게 뒷전이다. 일처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도 이번에는 어쩔 수 없다. 회사가 대수인가? 평생을 맘 속에 품고 살았던 칠암동 옛집에 가는 길이잖은가? 오래전에 나의 볼을 간질였던 그 온도의 바람이 여전히 나에게 앵겨든다.
칠암동으로 가는 길에서 아무도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모두들 자신의 일로 바쁠 뿐이었다. 내 삶에 관심을 둘 턱이 없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더 빨리 진주에 들렀어도 될 뻔했다. 진주라는 도시가 나를 질책할 것 같았고 모두가 나를 몰아세울 것만 같았었다. 그 마음을 떨치지 못하여 지금껏 숫제 진주를 잊으려고 애쓰며 살았다.
칠암동 그 집 앞에 당도하니 2층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마천루 사이에 옛 모습을 그대로 지닌 채 버티고 있었다. 나무 새시가 시스템 창호로 리모델링되었다. 쌀집이 있었던 곳에 ‘오징어순대 전문’이라는 간판이 을씨년스럽게 걸려있다. 요기도 하고 동정도 살펴볼 겸, 오징어순대 가게 문을 살며시 당겨 열었다.
“어서 오이소.” 문이 열리자마자 큰 소리로 주인장이 손님을 맞이한다.
“오징어순대 1인분만 주세요.” 주문을 하며 주인의 얼굴을 흘깃 봤다. 아니, 이게 누군가? 그녀는 바로 오징어 껍질을 벗겨 끝순이 아버지 술상을 차리던 진교 새댁이었다.
중년이 된 진교 새댁은 주방으로 황급히 들어갔다. 한눈에 봐도 딱 알겠건만 그녀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마음이 콩닥거렸다. 그동안 칠암동 집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라는 생각에 잠겨 있는데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오징어순대가 테이블에 놓였다. 다시 한번 더 진교 새댁을 올려다봤다. 의심할 것 없다. 그래서 말을 걸었다.
“끝순이 아부지는 잘 계시...지요?” 그걸 질문이라고 하고 있는 내가 한심했다. 당시에 60살 정도 됐으니 살아 있다 해도 백 살 노인일 텐데.
“그 영감탱이 얘기는 왜 하는 기요? 내 청춘 앗아간 인간을. 내가 끝순이 아부지만 생각하믄 이가 갈린다. 세상에 미친놈이, 그래, 지 막내딸 친구를 작살내나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짐승만도 못한 인간, 내가 지금만 되었어도 그 인간 관두었겠나? 씨팔, 다 엎어 버렸지. 요즘은 쳐다만 봐도 성추행으로 고발하는 시대 아닌교? 우리 엄마는 눈도 못 감고 세상 떠났어. 한번 더럽힌 이 몸을 남자들은 지들 좋을 대로 건드리고... 내 인생, 참 억울하다. 활짝 피어보지도 못한 꽃이다. 하얀 드레스도 못 입어 봤지. 그래도 내가 끝순이 아부지 때문에 오징어순대 만드는 것은 달인이 됐다. 이 진주 바닥에서 내 오징어순대를 못 묵어 본 사람이 없을 기다. 이거 먹어보믄 까무러치기 일보 직전이 된다 카이”
까무러칠 정도의 맛이라는 그 오징어순대를 달랑 한 입만 먹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있다가는 진교 새댁이 혈압으로 쓰러질 것 같았다.
아, 진교 새댁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리고 말았다.
진교 새댁의 가두어 둔 감정통을
내가 마구 휘저어 놓았다.
▲ 대문 파스텔화(ⓒ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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