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별리(別離) 끝에

#모브 (Mauve: 회색빛이 도는 연보라색)

by Cha향기

오빠가 말을 잇지 못했다. 오빠와 손을 잡고 촉석루 쪽으로 향했다. 왼편에 남강이 무심히 흘렀다. 강물 위에 논개 바위가 덩그러니 떠 있다. 그 자태가 하늘에서 뚝 떨어졌거나 벼랑에서 굴러 내린 듯했다. 예사로운 바위가 아니다. 진주에 사는 사람이라면 삼척동자도 그것을 알고 있다.


"저 바위 알지?"

"당연히 알지, 논개 바위, 의암 바위잖아."

"그렇지. 논개 자신도 죽고 왜장도 죽고... 자신의 목숨을 버리고 나라를 위했던 그 마음을 난 알 것 같아."

"그래서?"

"때론 사람이 천하보다 귀한 자기의 생명을 버릴 수도 있다고."

"그게 어쨌다는 거지?"

"난 너를 위해 죽을 각오도 되어 있단 말이야. 그러니 야코죽지 말라는 뜻이야."


알 듯 말 듯한 오빠 말에 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슬슬 서장대를 거닐며 우리는 나지막이 ‘제비’와 ‘아, 목동아’를 불렀다. 오빠와 나의 화음은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마지막 노래 엔딩 부분에서는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호흡을 가늠하고 절묘하게 페이드 아웃했다.


그러다가 오빠가 중앙 시장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먹거리가 가득했다. 시장은 밤이 되어도 지치지 않는 곳이었다. 여기저기에서 손님을 부르는 소리가 왁자지껄했다. 오빠와 함께 오뎅국을 먹었다. 처음 먹어 본 그 맛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요즘도 맛있는 오뎅국을 먹을 때면 오빠 생각이 난다.


"옴마야, 남매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야튼, 둘이 천생연분인가 보다. 보기 좋네. 많이 묵어라."

인심 좋아 보이는 아주머니는 오뎅 대접에 몇 번이나 국물을 더 넣어주었다. 그렇게 맘 놓고 맛있게 무엇을 먹어 본 게 처음이었다. 오빠도 그걸 아는지 자꾸만 오뎅 꼬치를 내 쪽으로 디밀었다.


시장을 빠져나오자마자 오빠가 다짜고짜 현금이 든 봉투를 내밀었다. 두둑했다. 적은 돈이 아니었다.


“어디서 이 돈이 났어?”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야, 맘만 먹으면 슈퍼에서 이것쯤이야.” 오빠가 으쓱대며 말했다.

"항상 내가 조금씩 챙겼어.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것이라고 예상했거든. 여차하면 나는 집을 떠날 참이었어. 근데 나보다는 너를 먼저 내보내야 할 것 같아."


오빠가 나 때문에 나쁜 짓을 하고 있었다니. 내가 빨리 오빠 곁을 떠나야 오빠가 마음을 잡을 것 같았다. 오빠를 위해서라도 내가 반드시 그 집을 나와야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사실은 극단적인 선택을 해버릴까 하는 생각을 몇 번 했었다. 사촌 오빠인 미정 아빠가 내 무릎을 만지는 것도 모자라 내 엉덩이나 사타구니를 더듬을 때는 그 치욕스러운 마음을 어떻게 할 수 없었다. 하늘 아래 그 누구에게 그 말을 한단 말인가. 쪽지 하나 적어놓고 콱 어떻게 해버리는 게 답이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러나 한 번도 집을 나올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막상 진주를 떠나려고 생각하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원초적인 두려움이 나를 덮쳤다. 그런 크기의 두려움은 죽음보다 더 무서운 것이었다. 세상이 금방이라도 늑대나 사자처럼 나를 덮칠 것만 같았다. 두려움 때문에 지레 질식할 판이었다.


그렇게 덜덜 떨며 오빠와 헤어졌다. 입은 옷 그대로 밤 기차에 몸을 실었다. 오빠가 건네준 현금 봉투만 쥐고... 나의 앞길은 캄캄하기만 했다. 기차 안에서 내다본 세상처럼 내 삶도 까만색이었다. 한 줄기 빛도 없는 세상으로 나는 던져졌다.




그렇게 진주를 떠나온 후 40년이 훌쩍 흘렀다.


부모님은 여전하신지? 큰 어머니는 살아 계실지? 얼굴에 검버섯이 가득했던 노 할머니는 이미 백골이 됐을 것이다.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기만 하던 그 생기 없던 눈빛은 때때로 꿈속에 나타나기도 했다. 요강을 내다 버리라는 말 대신에 곰방대로 문턱을 두들겨대던 노 할머니는 내 인생을 훤히 내다보셨던 건 아닐까?


오빠는 공부를 잘했으니 분명히 성공했을 것이다. 가정을 이루고 아름다운 아내와 행복하게 살고 있겠지. 자식은 몇이나 낳았을까?


모든 일이 어제 일처럼 또렷이 기억났다.


한평생이
하룻밤의 꿈같았다.



▲ 대문 파스텔화(ⓒ정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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