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비 핑크(Baby Pink: 사랑스럽고 부드러운 핑크)
오빠가 사라진 후 세 번째 날이었다. 그때도 진교 새댁의 오징어 껍질을 벗겨주고 있었다. 대문 밖에서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오빠였다. 오빠가 대문을 살짝 열고 그 틈새로 손짓했다. 나는 집안사람들의 동정을 살폈다.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
진교 새댁이 나를 떠밀며 말했다. 대문 쪽으로 달려 나갔다. 대문을 열고 나갔더니 오빠가 다짜고짜 내 손목을 잡았다. 마구 달리기 시작했다. 영문도 모른 채 나도 오빠랑 달렸다. 아무도 쫓아 오지 않는 길을 우린 숨차게 달렸다. 자동차 공업사를 지나 남강 다리까지 단숨에 달렸다. 남강 다리에 당도하니 오빠가 천천히 멈춰 섰다. 말없이 한참을 걸었다. 그러는가 싶더니 오빠가 조용히 시를 읊기 시작했다.
남강은 붉게 변하고 있었다. 노을이 가득한 강물이었다. 물결이 추운 듯 뒤척였다. 오빠 손을 꽉 잡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오빠 손에서 땀이 났다. 촉촉함이 참 좋았다. 내 손에서도 땀이 났다. 우리의 맞잡은 손은 계속 젖어 있었다. 오빠의 숨결은 뜨거웠다. 오빠가 뭔가 꾹꾹 참고 있는 듯했다. 오빠가 나를 안고 싶어 한다는 걸 직감했다. 오빠도 나를 원하고 나도 오빠를 원했다. 우린 그런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서 약속이나 한 듯이 서로의 손을 슬며시 뺐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은 흐르고
우리네 사랑도 흘러내린다
내 마음속에 깊이 아로새기리
기쁨은 언제나 괴로움에 이어옴을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는 머문다(중략)
시를 다 읊은 후에 오빠가 쪽지 하나를 내게 건넸다. <미라보 다리>라는 시가 적혀있었다.
“이 시를 너도 외워. 난 이미 다 외웠어.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 나는 너를 지켜줄 수가 없어. 너의 인생은 네가 헤쳐나가야 해. 나는 죽을 때까지 너를 잊지 않을 거야. 그리고 내가 이다음에 너를 꼭 찾을게. 일단 오늘 당장 우리 집에서 나가. 너는 우리 집에 있으면 평생 이 모양 이 꼴로 살게 돼. 어떻게 하든지 공부를 해야 돼. 기술도 배워야 하고.”
"무슨 소리야? 내가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라고? 난 오빠 없이 못 살아."
"지금은 그런 생각이 들진 몰라도, 넌 일단 이 집만 떠나면 뭐든지 다 할 수 있어. 난 널 믿어. 너를 모르는 낯선 도시로 가서 살면 돼."
오빠가 나를 안았다. 나도 오빠 품에 안겼다. 우린 사랑하고 있었다. 가슴 설레고 그냥 함께 있고 싶은 그런 사랑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오빠도 그랬을 것이다. 오빠가 산보다, 하늘보다 든든했다. 이 세상에 오빠만 있으면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우린 좋아하면 안 되는 사이라는 걸 서로 알고 있다. 그러나 사랑하고 있다는 감정을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다. 이성이 감정에게 이래라저래라 참견할 수 없는 것이다. 감정이 흐르는 걸 막을 재간은 그 누구에게도 없다. 다만 억제하는 척할 뿐이다.
그 다리 한가운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빠를 찾으면 다 될 줄 알았는데... 그러나 오빠 마음을 알게 됐다. 진주, 아니 칠암동을 떠나기로 맘먹었다.
오빠가 하라는 대로
하기로 결심했다.
▲ 대문 파스텔화(ⓒ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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