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들었던 팝송

#민트 그린(Mint Green: 상쾌하고 청량한 녹색)

by Cha향기

2층, 세 번째 방에는 대학 강사가 살았다. 그 강사는 어머니가 제일 좋아하는 세입자다. 우리 슈퍼에 자주 들러 매상을 올렸다. 고급 양주며 맥주는 물론 담배도 많이 샀다. 그러나 그의 방 앞은 내가 일해야 할 몫이 많았다. 연탄재와 쓰레기, 그리고 술병 등을 들고 내려와야 했기 때문이다. 대학 강사는 종종 여자를 데려왔다. 그녀는 이마가 유난히 넓었다. 여자는 며칠씩 그 방에서 지내다가 갔다. 그녀의 말씨는 우리랑 사뭇 달랐다. 그녀는 광주 사람이었다.


“전라도쟁이데이, 전라도쟁이, 저 사람들은 말할 때, 깽, 깽, 깽이라고 한단다. 전라도 말은 그렇다 카더라. 좌우지간 조심해야 된데이, 광주에 전쟁이 났다 카더라. 북한 군이 쳐들어 왔다나, 어쨌다나. 아이고, 무시라. 별 소문이 다 들리더라."

큰 어머니가 밑도 끝도 없는 말을 했다. 하지만 정작 그녀는 내게 포근하고 따뜻했다. 대학 강사가 출장 간 날이면, 그녀는 나를 그 방으로 불러 올렸다.


"넌, 왜 학교에 안 다녀? 사람은 배워야 거시기 한당께? 지금은 아무시랑토 않는 거 같아도 나중에 인생 살라면 팍팍해 부러야."

"...."

난 할 말이 없었다. 내가 왜 학교에 다니지 않는지? 그 이유는 나조차 몰랐다.


"너는 얼굴도 거시기하고 부지런하여 잘 살겨. 기회가 되면 꼭 공부해. 으째서 너네 부모님은 너 같은 애기를 학교에 보내지 않을까이? 징하게 갑갑하네, 참말로. 환장하겠네. 시방"

그녀는 내 인생을 걱정하며 줄담배를 피웠다. 사실, 그녀의 걱정 어린 말을 듣고 나서부터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2층 마지막 방에는, 굽 높은 슬리퍼를 시끄럽게 끌며 다니는 국선 언니가 살았다. 그 언니는 한겨울에도 찬물로 머리를 감았다. 세숫대야를 들고 마당에 있는 우물가에 내려오곤 했다. 그녀는 주로 블라우스에 짧은 치마를 입었다. 국선 언니가 머리를 감으려고 엎드리면 엉덩이와 허벅지가 보일락 말락 했다. 언니 허벅지엔 푸르댕댕한 점이 있었다. 국선 언니가 머리를 감을 때마다 나는 그 푸른 점을 유심히 봤다. 국선 언니는 추위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언니는 타월로 머리를 말리며 휘파람을 불곤 했다. 2층으로 올라가는 언니를 붙잡고 내가 말을 걸었다.


"언니는 좋겠다. 멋진 DJ라서..."

"DJ, 그런 건 암것도 아이다. 니거 오빠가 멋진 사람이지. 노래를 얼마나 잘하는지... 니거 오빠는 유명한 가수가 될 기다. 조용필보다 니거 오빠가 노래를 더 잘 부르더만."

국선 언니는 '너의'라는 말을 '니거', '이거'라고 하며, 특이한 사투리를 썼다.


"언니야는 고향이 오데고?"

"남해에 있는 율도라는 섬인데, 밤섬이라고도 해. 그런데 아주 어릴 때 그 섬을 떠났데이. 엄마가 나를 잘 사는 집에 보냈다 카더라. 엄마가 머리를 잘 쓴 거제? 그 이후로 쭈욱 물건리에서 살았다 아이가. 그래서 내 고향은 밤섬이 아니라 물건리다. 알았제? 이제?"

"응, 알겠다. 그런데 언니야가 DJ 하는 음악다방에 놀러 가 봐도 되나?"

"괜찮지, 아무 때나 와. 니거 오빠랑 같이 와도 돼. 니거들이 오면 요구르트나 목장 우유를 줄게."




국선 언니가 DJ로 일하는 다방에 가본 적이 있다. 오빠랑 함께 갔다. 국선 언니는 헤드폰을 낀 채 유리상자 안에 앉아 예쁜 목소리로 멘트를 날렸다. 그러자 다방 안에 음악 소리가 쫙 깔렸다. 내 가슴이 쿵쾅거렸다. 음악의 비트가 천정을 두드리고, 바닥을 치고, 벽에도 부딪쳤다. 나중에 알았는데 그게 서라운드 음향 시스템이란 거였다.


그날 나는 패티 페이지의 'I went to your wedding.(너의 결혼식에 갔었지.)'이라는 노래를 들었다. 내가 처음으로 들었던 팝송이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그 노래를 듣다가 나도 모르게 서러운 생각이 확 밀려왔다. 삶이 나를 무척 조롱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삶에 대하여 슬슬 오기가 발동했다. 초라한 마음이 들다가, 나의 꿈은 이제 끝났다,라고 하는 맘에서 기어이 일어서고 싶은 맘이 들게 했다. 그 노래를 듣고도 울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오빠의 눈가도 촉촉했다.


"야, 너, 뭐 좀 아네. 음약을 들을 줄 아는구나."

국선 언니한테 눈물을 들키고 말았다. 근데 국선 언니는 그 노래가 흘러나와도 눈에 물기 하나 없었다. 국선 언니는 그런 노래 앞에서도 헤헤거리며 웃는 걸 보니, 심장이 든든한 여자로 보였다.


‘나도 이담에 DJ나 되어 볼까? 온종일 저런 노래를 들을 수 있다면...’

나는 혼자서 중얼거렸다. 오빠는 노래의 비트에 맞춰 손가락으로 타닥타닥 테이블을 치거나 발로 박자를 맞췄다. 그러다가 어깨로 리듬을 타기도 했다. 그런데 오빠는 눈을 감고 있었다. 굳이 내 눈을 보지 않으려는 모양새였다.



국선 언니는 언제나 종종걸음이었다. 언니는 일이 없으면 온종일 잠만 잤다. 마구 바쁘거나 아주 일이 없어서 늘어지게 자는 것, 그 둘 중의 하나가 국선 언니의 일상이었다. 그러다 보니 국선 언니 부엌에서 음식물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세상에 우야믄 이러키 게울를꼬? 여자가 게울르믄 몬 쓰는 기라. 으이구마, 추접데이.” 큰 어머니는 국선 언니를 죽도록 싫어했다.


그런데 나는,

국선 언니가 싫지 않았다.
친언니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때때로 있었다.
어디서 본 듯한 느낌도 들었다.
언니 허벅지에서 봤던 푸른 점이
내 사타구니 쪽 허벅지에도 있다.

▲ 대문 파스텔화(ⓒ정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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