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몬 쉬폰(Lemon Chiffon: 연하고 밝은 노란색)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다. 모두가 떠난 자리를 지키고 사는 진교 새댁은 칠암동 그 옛집에 남겨진 그루터기인 듯했다. 나무가 베인 자리에 버티고 있는 그루터기가 벌레에 먹히며 썩어 문드러지기도 한다. 마치 진교 새댁이 그 꼴이었다. 상처로 버티고 있는 그루터기 같았다. 진교 새댁 마음의 상처는 건드리면 터질 판이요, 곪을 대로 곪아서 쉽게 덧날 지경이었다.
견디기 힘들어서 그곳을 떠나 살았던 나 자신과, 상처를 부여안고도 그곳을 떠나지 않은 채 살고 있는 진교 새댁과는 어떤 심리적 차이가 있을까? 상처를 마주하는 게 옳은가? 일정 거리를 두고 떠나 있는 게 맞는가? 혼란스러운 마음을 안고 오징어 순댓국 집을 나오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교 새댁은 내가 누구인지 알아볼 의욕 따위는 애당초 없어 보였다. 세상을 향하여 악다구니를 퍼붓는 것으로라도 터질듯한 가슴에 공기를 집어넣는 모양새였다. 습관처럼 읊어대곤 했을 레퍼토리를 줄줄 쏟아내고 있었다.
“저, 탁청희입니다.”
“탁청희라? 누구더라?” 진교 새댁에게는 탁청희라는 사람이 기억에 없어보였다. 그녀는 내 존재를 깡그리 잊고 있었다. 그래서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다. 구태여 나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하기조차 싫었다. 차라리 잘 된 일인 것 같았다.
“진주가 많이 변했네요. 안채에 살던 가족들은 안녕하신지요?”
“그 사람들은 쫄딱 망했지, 미정이 아부지가 노름해서 큰 집 다 날렸지. 지금은 쌀집 아지매가 이 집 주인이야. 쌀집 아지매는 복 받아야 된다 카이, 자기도 딸자슥 가진 사람이라믄서, 나한테 무료로 이 가게를 빌려주었다 아닙니꺼, 그런 사람이 복을 못 받으믄 누가 받겠습니까? 쌀집이 부자 되는 것 보니까 사람 팔자 모르겠습디더, 세상에, 쌀집은 시골에 있던 쓸모없는 전답이 금싸라기 땅이 됐지. 그 뭐더라? 고향 선산에 골프장이 들어서서 돈방석에 앉았다 하지. 아참, 안채 인간들은 모두 흩어졌습니더, 작은댁 아들은 결혼도 안 하고 이 집을 떠나지 못하고 있지. 답답한 사람이라 카이.”
진교 새댁은 쉬지 않고 중얼댔지만 나는 조용히 그 자리에서 돌아섰다.
“안채 작은댁 아들은 상사병이 걸린 기라. 어릴 때부터 한 여자를 좋아했었다는 소문도 들리고... 괜찮은 사람이었는데 나이 들어가면서 저렇게 폐인이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꺼?”
상사병? 그거 걸려보지 않으면 모른다. 무기력과 불면증으로 도지다가 구역질과 어지럼증이 오기도 했다. 계절에 따라, 시간에 따라 여러 증상으로 사람을 끝없이 우울하게 하던 것이 상사병이지 않은가? 한평생을 그 병에 걸려 허우적댔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오빠도 그렇게 아픈 세월을 보냈단 말인가?
진교 새댁이 쏟아내는 말을 뒤로하고 건널목 앞에 섰다. 오징어 순댓국 집 바로 옆에 있는 슈퍼를 흘깃 훔쳐봤다. 그냥 얼른 길을 건너고 싶었다. 당장에라도 오빠가 슈퍼 문을 열고 나올 것만 같았다.
건널목을 건너 반대편에 서서 슈퍼를 바라보았다.
딴 세상으로 다 바뀌었는데
그 슈퍼만 세월을 비켜간 듯
비루하게 버티고 있었다.
▲ 대문 파스텔화(ⓒ정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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