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랄 블러쉬(Coral Blush: 핑크빛이 도는 연한 코랄색)
칠암동은 몰라볼 정도로 변했다. 칠암동에 대형 병원이 들어섰는가 하면 아파트가 세워져서 딴 세상 같았다. 그런 마천루 틈바구니에 초라하고 비루해 보이는 <칠암동 슈퍼>라는 간판이 보였다. 요즘 누가 ‘슈퍼’라고 하나? 섬마을에도 24시 편의점이 입점해 있는 시절인데 말이다.
칠암동, 그 옛집 맞은편에 <오후 6시, DJ>라는 카페가 있다. 그 카페와 칠암동 슈퍼는 도로를 가운데 두고 서로 마주 보고 있다. 다른 건물들이 현대식 고층 빌딩으로 바뀌어 있는데 비해 옛 모습을 간직한 채 슈퍼와 카페는 옛터를 그대로 지키고 있었다.
카페 안은 커피 향이 안개처럼 자욱했다. 진하다 못해 취할 것 같은 커피 향이다. 그 향에 취한다면 내 혼이 그 시절로 돌아가 마음껏 오빠를 만나고, 오빠와 밀린 얘기도 할 수 있을 텐데...
어디에 앉을까 고민하며 자리를 두리번거리다가 슈퍼가 보이는 곳에 앉아 슈퍼멍을 때리기로 했다. 나도 모르게 사르르 꿈나라로 가버리고 싶었다. 나른함이 확 밀려왔다.
“어서 오세요~”
카운터에 있던 젊은 여자 대신, 코너에서 중년 여성이 큰 소리로 웰컴 인사를 했다. 손님이 거의 없었다. 오후 5시였다. 카페에 가기엔 어중간한 시간대였다. 그녀는, 흘깃 봐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짧은 핫팬츠에 뾰족구두를 신고 있었다. 올림머리를 한 뒤태가 왠지 익숙했다.
카운터에서 메뉴판을 올려 보노라니 글자가 춤을 춘다. 도저히 메뉴를 읽어낼 수가 없다. 그 도시, 다시는 서지 않을 것 같았던 진주에 있다는 게 꿈같았다. 흔들리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메뉴 고르기가 쉽지 않았다. 메뉴판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인사를 건넸던 중년 여성이 다가왔다.
“선불입니다. 주문 먼저 하세요.”
“네에.”
“아니면 좀 쉬셨다가 주문하셔도 됩니다. 무척 피곤해 보이시네요.”
“네에, 서울에서 왔거든요.”
“그렇군요. 멀리서 오셨군요.”
“혹시, 이 카페 사장님이신가요?”
“네에, 원래는 다방을 했다가 다음에 커피숍도 했다가... 또 몇 번 사기도 당하고 말아먹기도 하고 그랬어요. 물장사로 한평생을 보냈네요.”
“카페 이름이 독특해요.”
“네에, 항상 오후 6시에 커피를 마시러 오는 남자가 있어요. 그를 위해 지은 카페 이름이에요.”
잠시 머뭇거리다가 내가 그녀에게 물어봤다.
“아, 네에, 그런 분이 있군요. 혹시 아주 오래전에 저기 앞에 있는 건물 2층에서 살지 않았나요?”
“어떻게 그걸 아시지? 참 오래전에 살았지요. 그래서 지금껏 여길 떠나지 못하고 있어요. 지금도 그 방에 살고 있어요. 평생 월세방에 사는 팔자네요. 월세 가격도 그대로예요. 아마도 그 방에 자석이 있나 봐요. 난 다른 데는 갈 수 없는 인생인가 봐요.”.
“그러시구나.”
그러더니 갑자기 그녀가 사랑타령을 했다.
“사랑이 말입니다. 사랑의 화살표가 막막 비켜 가더라고요. 내가 바라보는 사람은 나 아닌 다른 곳을 겨냥하니까요. 그가 나를 바라보지 않더라도 내가 그 사람을 여전히 사랑한다면 그건 찐 사랑이죠?”
“어머, 찐 사랑을 하시나 보다.”
“저야, 이번 생은 바라보며 살려고요. 신기루 같은 사랑으로 끝내려고요.
"해바라기처럼요?" 내가 그녀 말에 리액션을 넣어주었다.
그러자 여인의 눈에 물기가 고였다. 그런 얘기를 하다가 눈시울이 무던히도 붉어 봤던 모양새다.
사랑은 늘 도망간다고 누군가 말했다.
그 사랑을 마침내 잡으면
서로 사랑할 수 있겠지만
어떤 사랑은
늘
쫓아가고, 도망가는
술래잡기 같은 것이다.
▲ 대문 파스텔화(ⓒ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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