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랄 블러쉬(Coral Blush: 핑크빛이 도는 연한 코랄색)
“아, 그러시군요. 제가 급성 난독증이 온 듯해요. 메뉴가 눈에 들어오지 않네요. 혹시 추천할 만한 게 있나요?”
“우리 집 커피는 다 맛있어요. 제가 한 남자에게 진심이고 커피 내리는 데도 그렇거든요.”
메뉴판에서 마실 커피를 고르려다가 습관처럼 카푸치노를 마시기로 했다. 그러자 그녀가 자리를 뜨려고 했다. “그럼 좋은 시간 보내세요.” 그녀가 화분 쪽으로 향했다. 그래서 그녀를 붙잡으려는 듯이 얼른 말을 걸었다.
“저기 앞 건물에 살던 가족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면서요? 좀 전에 오징어 순댓국 집에 들렀거든요.”
“또 진교 새댁이 아무에게나 유성기처럼 레퍼토리를 읊었군요. 그분은 끝순이 아버지한테 배신당하고, 나는 저 앞에 있는 남자한테 까이고... 그래서 순댓국집 여자와 나는 사랑 때문에 상처를 입은 전우랍니다.”
그녀가 하는 말에 건너편 슈퍼 안을 유심히 바라봤다. LA 모자를 푹 눌러쓴 사내가 맥 빠진 듯이 슈퍼 안을 서성거리고 있다.
“문제는 저 인간이 여자한테 관심이 없는 냉혈한이란 겁니다. 별짓을 해도 꿈쩍 안 해요. 그래서 이렇게 나를 보여주려고 외모 관리를 하며 살았어요.”
그녀는 화분 옆에서 한 바퀴 사르르 돌며 말했다. 그 순간 나는 알아챘다. 백치미가 살짝 있었지만 푸근했던 바로 그 국선 언니였다. 2층 끝방에 세 들어 살았던 언니...
“혹시 저 모르시겠어요?”
“누구신...지?”
“국선이 언니 맞죠?”
“어떻게 저를?”
“저 탁청희...”
그 말에 그녀가 몸의 긴장을 확 풀고 호들갑을 떨었다.
“옴마야, 이 무슨 일이고? 니가 이렇게 멋쟁이가 됐다고? 서울 물이 다르긴 다르네. 난 이렇게 폭싹 늙었는데.”
“창휘 오빠는요?”
“저기, 있잖아.”
국선 언니가 '칠암동 슈퍼' 쪽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거 몰라? 창휘 친엄마가 왔었다니까.”
“그게 무슨?”
“넌 도대체 어디서 꼭꼭 숨어 살다가 이제 나타났어? 창휘가 넋을 놓고 지내니까 창휘 친엄마한테 연락했대. 창휘에게 모든 걸 밝혀버렸다나? 창휘도 그 사실을 진작부터 눈치채고 있었는지 덤덤하더래. 아무튼, 그런 건 자세히 모르겠고, 내가 창휘 마음 잡아보려고 한평생 애를 쓰는데, 그거 안 되네.”
꿈일 것이다. 모든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냥 다시 진주를 떠나버릴까 하는 생각이 훅 밀려왔다. 오빠와 내가 남매라면? 내가 오빠를 남자로 느꼈는데? 이게 생물학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동성애에 대해 들어보긴 했지만, 혈육 간에 사랑을 느낀다고?
유사연애? 혈육애? 혈연애? 형제애?
아, 몰라, 몰라. 그런 걸 들어본 적이 없다. 어쩌면 내가 오빠한테 느꼈던 게 남녀 간에 느끼는 사랑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냥 지독한 외로움과 서러움 속에서 유일하게 빛처럼 다가오는 오빠한테 인간애를 느꼈을 수도 있다. 그래도 그렇지. 분명히 설렜고 짜릿했다. 이건 동성애보다 더 내려놓기 힘든 감정일지도 모른다.
어질어질했다. 차라리 진주에 오지 말았어야 했나? 아니지, 아니지, 잠깐만! 오빠와 나를 각각 다른 집에서 데려왔을지도 모른다. 그럴 수도 있겠다. 오빠만 생각하면 가슴이 콩닥거렸는데... 그건 그렇고, 왜 가족들은 오빠한테는 잘해 주고 나에게는 박절하게 했을까? 둘 다 데려온 아이였다면?
“아, 언니, 오빠한테는 나에 대해 아무 말 마세요.”
그렇게 입막음을 해두고 자리를 나오려는 데 만감이 교차했다.
때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부딪쳐 보고 싶다는 오기 같은 것이 올라왔다. 묻어두고 말 일이 아니다. 진실을 알아내고 그 진실 앞에 당당히 서고 싶다. 그러나 어안이 벙벙하여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서둘러 카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바람이 싸늘하게 가슴팍으로 불어왔다.
▲ 대문 파스텔화(ⓒ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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