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이스 블루(Ice Blue:차가운 느낌의 연한 파란색)
슈퍼 앞에 있는 파라솔 테이블에서 요기를 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슈퍼 뒷문 쪽으로 노파가 들어왔다. 카운터에 있던 청년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노파에게 깍듯이 인사한다. 노파가 행복수를 가리키며 뭐라고 한다. 청년은 내가 있는 쪽을 가리킨다. 그러더니 청년이 슈퍼 안으로 들어오라는 손 시늉을 한다.
'내게 뭘 도와달라는 건가?'
잔뜩 궁금한 맘으로 슈퍼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에 달린 딸랑이는 문을 여닫을 때마다 딸랑거린다. 내가 슈퍼에 막 들어서자 노파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딸랑이의 여운과 노파의 중얼거림이 한데 어우러졌다.
“이거, 우리 창휘 글씨네.”
“아, 네에.”
행복수 가지에 꽂혀있는 종이쪽지를 들어 보인다. 종이 조각을 든 노파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 순간 나도 떨었다. 그녀가, 오빠와는 어떤 관계냐고 묻지 않았다. 혹시 너가 청희냐?라고 묻지도 않았다. 그런데 쪽지를 집은 노인의 엄지 손가락을 보고 난 얼어붙고 말았다.
내 엄지 손가락과 닮은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무 마디 엄지 손가락! 마디 없는 엄지로 물건을 집을 때마다 걸핏하면 뭘 떨어뜨리곤 했다. 그래서 큰 어머니에게 구사리도 무던히 얻어들었다.
"니는 손이 비틀어 문들어졌는가 보다. 뭘 집기만 하면 떨어뜨리네. 여자가 야물딱지지 못해 가지고 어디에 쓰노?"
그런 소리를 듣곤 했지만 내 엄지 손가락 모양이 남들과 다르다는 걸 몰랐다. 친엄마와 함께 살았더라면 내 손을 찬찬히 살펴보며 내가 물건을 잘 떨어뜨리는 이유가 무 마디 엄지 손가락 때문이란 걸 말해주었으려나?
뭉텅하거나 비뚤어진 엄지를 본 적은 있지만 마디 없이 그냥 쭉 뻗은 엄지 손가락을 본 적이 없다. 내 손이 부끄러웠다. 어딜 가나 엄지를 숨기는 버릇이 생겼다. 얼마나 교묘하게 엄지를 잘 숨겼던지 아무도 내 엄지 손가락이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마디가 없어서 못 생긴 나의 엄지 손가락을 남에게 들키지 않고 잘도 살았다. 또한 나 자신도 잘 가리며 나 아닌 모습으로 멋지게 잘 살았다. 내가 천하에 의지가지없는 고아라는 걸 아는 이가 없다. 나는 감추는 데 명수다.
내게 어머니는 있었지만 친엄마가 없었다. 그런데 노파의 엄지를 보고 확신했다. 내 앞에 있는 노파는 나의 친엄마라는 것을. 노파와 나는 엄지 손가락이 빼다 박은 것처럼 닮았다. 더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엄마가 오빠의 친엄마가 아닐 수 있어도 내 엄마인 건 확실해졌다. 엄마를 마주했다. 긴 꿈 속에 있는 듯했다. 이미 내 가슴은 콩닥거리다 못해 멈출 듯했다.
“제가, 청희예요.”
“뭐라고?”
노파가 휘청거렸다. 청년이 노파를 부축했다. 그리고 청년은 휴대폰에 대고 외쳤다.
“사장님, 빨리 슈퍼로 좀 오세요. 여기 청희라는 분이 오셨어요. 지금.”
청년은 뭔가 눈치챈 듯 벌벌 떨며 통화했다. 건너편 카페에 있던 오빠가 통화하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게 보였다. 나는 스툴 의자에 털썩 앉았다. 약간 어지러웠다. 속이 메스껍기도 했다. 호흡이 잠깐씩 멈추기도 했다. 오빠가 신호등을 기다리며 건널목 앞에 서 있다. 오빠가 내 쪽을 바라보고 있다.
이윽고 오빠가 슈퍼 문을 후다닥 열었다. 그리고 나를 보더니 다짜고짜 나를 일으켜 세운 후에 껴안기부터 했다. 오빠의 심장은 기차 소리만큼 크게 뛰고 있었다. 다리에 힘이 쑤욱 빠졌다. 그대로 주저앉아버릴 것만 같았다.
“너무 늦게 왔잖아. 짜식! 인마.”
오빠가 웃었다. 오빠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그리고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엄마도, 나도, 오빠도. 카운터에 있던 청년도 딴청만 피우고 있었다. 엄마는 쪽지를 거머쥐고 떨고 있었다.
“일단, 우리, 위로 올라가자.” 오빠는 이미 예정된 각본대로 연기하는 배우처럼 엄마와 나를 끌고 슈퍼에서 나왔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그대로였다. 엄마를 부축하여 천천히 계단으로 올라갔다.
2층에 올라서서 창을 통하여 내다보니 안채는 확 바뀌었다. 땅만 그대로일 뿐이지 모든 것이 최신식으로 리모델링되었다. 안채를 바라보고 있자니 큰어머니가 빗자루를 들고 청소하는 모습이 아른거리고, 노할머니의 곰방대 두들기는 소리도 들리는 듯했다. 어머니가 매니큐어 칠한 손톱을 호호 불던 모습, 김양을 만나러 가려고 틈을 노리는 아버지의 모습도 떠올랐다.
오빠는 그 시절 대학생 형제가 사용했던 2층 첫 번째 방 문을 열었다.
“난 이렇게 살아. 온 집안이 다 날아갈 판이었을 때, 상가는 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어. 담보 대출하여 이걸 내가 차지했어. 그래서 2층이랑 슈퍼는 내 거야. 그래야 청희가 언제라도 찾아올 수 있을 것 같았어.”
조촐한 방을 보니 숨이 막혔다. 오빠가 또 웃었다. 오빠는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나만 기다리며 투구벌레처럼 한평생 살았나 보다. 겨우 눈빛이 돌아온 듯한 엄마가 입을 열어 말했다.
“이런 날이 다 있네. 난 인자 죽어도 한이 없데이. 노순희, 오래 살았더니 이런 날이 오네. 잘 왔다. 내가 너를 한시도 잊은 적이 없데이.”
노트북을 꺼내어 일사천리로 연차 신청서를 제출했다. 이제는 진주에서 다시는 도망치지 않기로 했다. 아무리 진주가 나를 밀어낸다 해도 버틸 생각이다. 내가 내 삶의 주인공이 되어 당당히 서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오빠가 내 눈앞에 있으니 못 할 일이 없을 것 같다. 오빠는 뭐가 좋은 지 연신 웃고 있다.
오빠는 좋아서 웃는 것일까?
기가 차서 웃는 것일까?
그래도 웃는 오빠를 보니 맘이 편했다.
오빠의 얼굴에 있는 웃음 근육은
참 오랜만에 움직여 보는지
어색하게 꿈틀댔다.
▲ 그림 ⓒAI
#오빠가웃었다.
#쪽지
#행복수
#엄지손가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