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듭이 조금씩

#라벤더(Lavender:우아하고 신비로운 보라색)

by Cha향기

엄마가 방구석에 세워둔 막걸리를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했다. 나도 다른 병을 들고 마셨다. 오빠는 소주를 마셨다. 우린 술잔 따윈 필요 없이 병나발을 불었다. 그게 우리의 DNA였다. 더 이상 엄마가 하는 얘기를 들을 수 없었다. 정신이 몽롱해져야 숨이라도 쉴 것 같았다. 혀가 꼬부라질 때까지 마구 마시고 아무 말이나 해대고 싶었다. 보아하니 오빠도 같은 심정인 듯했다.


“그 가시나를 찾으려면 창선면 물건리 쾌생 의원한테만 가면 금방이었지. 내가 찾으려고 하면 왜 못 찾겠노? 근데 그 가시나가 진작에 진주로 나가 버렸다 카더라. 글마가 쾌생 의원댁 은공을 잊고 연락 끊고 산다 카더만. 사람이 그라믄 안 되는 긴데. 그래도 아마 우리 창선이는 잘 살 거야. 가시나가 보통 여문 애가 아니었데이. 얼굴도 반반했지. 내 죄가 이러구러 많데이. 갸는 허벅지에 퍼런 점이 있었다. 그래서 점선이라고 할라다가 그냥 창선면에서 태어났으니 창선이라 이름을 지었다 아이가.”

엄마는 쉬지 않고 주절주절 실타래 풀어놓듯 말했다.


‘허벅지 점?’

늪으로 빠져들어 가듯이 나는 오래전 기억의 시궁창 속 미궁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마당에 있던 우물가에서 나는 국선 언니 허벅지를 봤었지. 푸르댕댕한 커다란 점이 보이던 국선 언니의 허벅지가 지금도 눈앞에 생생하다. 이럴 수도 있을까? 설마 국선 언니가 창선 언니?


‘혹시 국선 언니가?’ 그것으로는 불충분하다. 이름도 다르다. 그래서 다급하게 엄마한테 물었다.


“그 언니에게 또 다른 특징이 있나요?” 내 손이 축축해지고 있었다.

그 퍼런 점이 엉치뼈 언저리에도 있었다. 갸한테 있는 점은 없어지지 않더라. 우리 동네 아지매가 물건리 목욕탕에서 쾌생 의원 사모님이랑 목욕하고 있는 창선이를 봤다더라. 엉덩이 점이 고대로 있었다 카더라. 별시럽게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단을 제대로 내려갈 수 없었다. 다리뿐 아니라 온몸이 떨렸다. 오빠는 나를 따라나서지 않았다. 어쩌면 오빠가 그걸 미리 짐작하고 있었던 것일까? 계단을 내려와 출입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바람이 또 야유하듯 내 뺨을 때렸다. 바람은 늘 나를 따라다닌다.


도로가 건널목 앞에서 일단 멈추긴 했지만 신호등 색깔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냥 아무렇게나 달려버릴까 보다,라는 생각이 치밀고 올라왔다. 이번 생은 온통 꼬이고 꼬여 매듭을 풀 끄트머리 끄나풀을 찾을 수가 없다.


"빵빵빵!!!!!!!!!!!"

멍 때리며 건널목 앞에 서 있으니 정지선에 있던 차가 클랙슨을 울린다. 초록불이다. 초록은 안전하지. 건너야지. 내 인생은 지금 빨간 불인데. 나는 구시렁대며 건널목에 발을 들여놓았다.


'별 사람을 다 보겠네. 실성했나?'

그런 메시지를 담은 소리로 빵빵거렸다. 그래도 서두르지 않고 건널목을 건넜다. 정지선에 멈춰 선 모든 차들이 나를 비웃고 있었다.


'천하에 재수 없는 년!'라고 하는 듯했다. 그 순간 나는 오기가 생겼다. 차를 운전하는 기사들이 나의 관객으로 여겨졌다. 나에게 그런 관종 끼가 숨어 있었다. 술의 힘이 큰 듯했다. 부끄럽지도, 두렵지도 않았다. 마치 연극배우가 된 것처럼 건널목을 무대 삼아 차분히 또박또박 걸었다. 마치 모델이 런웨이를 잔뜩 뽐내는 모양새로 걸었다. 그러나 술기운이 거나해진 내 걸음은 누가 봐도 휘청거렸을 것이다. 그때 누군가 나를 확 잡아채며 서둘러 건널목 밖으로 끌고 나갔다. 목덜미에 뜨거운 기운이 닿았다. 오빠였다. 소주를 마신 오빠가 나보다 더 멀쩡했다.


"너, 왜 이래? 정말? 정신 좀 차려."

"알아볼 게 있단 말이야."

"뭘?"

"그런 게 있어."


카페로 들어갔다. 오빠도 따라 들어왔다. 오빠와 다만 몇 걸음이라도 연인처럼 다정하게 걸어보고 싶었다. 아니, 이대로 오빠랑 지구 끝까지 도망치고 싶었다. 난 그냥 오빠가 좋다. 오빠도 그럴까?




밤이 깊었는데 카페 안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사장님?”

내가 카운터에 있는 여자에게 물었다.


“저기.” 국선 언니는 화분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나는 그쪽으로 다가가서 얼른 언니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언니, 창휘 오빠 만났어. 여기, 엄마도 만났고...” 오빠를 가리키며 내가 말했다.


“애나?"

언니는 나를 보지 않고 오빠를 쳐다보며 말했다.


"니거는 좋겠다. 서로 만났고, 또 엄마도 만나고...”

“근데, 언니 여기 좀 앉아 봐.”

“왜?”

언니의 눈길이 이상해졌다. 오빠는 맞은편에 앉았다. 오빠가 정신을 차리려고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술 냄새 많이 나? 미안해. 근데, 언니 몸에 파란 점 있어?”

“너, 뭐 하는 거냐? 다짜고짜?”

“말해 봐. 있지? 엉덩이뼈 부분에 몽고반점 있지?”

언니는 앞에 있는 오빠 눈치를 살폈다. 언니에겐 내가 보이지 않나 보다. 언니에겐 나라는 사람이 투명인간이었다.


“그걸, 니가 어떻게?”

국선 언니가 사색이 됐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우린 한동안 아무 말하지 않았다. 언니가 눈치챈 듯했다.


“언니가 내 친언니네. 그렇네. 맞네.”

그러자 오빠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카페 밖으로 나갔다. 언니는 일어서는 오빠만 쳐다보며 내 말은 귓등으로 듣고 있었다.


“야, 장난하지 마. 오늘이 만우절이야? 그래도 그렇지. 그런 장난을...”

“언니 잠깐만, 슈퍼 2층으로 가보자.”

국선 언니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국선 언니가 넋이 빠진 사람처럼 눈에 초점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이건 아니야. 이럴 수 없어.”라고 언니가 중얼거렸다.

국선 언니가 울기 시작했다.
나도 울었다.
그리고 언니 손을 잡고 카페에서 나왔다.


▲그림 ⓒ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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