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카이 블루(Sky Blue:맑고 차분한 하늘색)
엄마
노순희는 한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어린 창휘를 업고 날만 새면 부둣가로 나갔다. 어쩌면, 창휘 아버지가 바다 밑으로 걸어서 돌아올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창휘를 그대로 두고 떠날 사람이 아니었다.
창휘는 부둣가에만 나오면 바다를 향하여 손뼉을 치며, “아부지! 아부지!”라며 소리쳤다. 창휘의 애절한 목소리가, 바닷속 어딘가에서 발버둥을 치고 있을 남편에게 닿을 것 같았다. 순희는 내내 환영에 빠져 살았다.
“아이구, 창휘 어매야, 정신 좀 채려라이. 얼라를 생각해라.”
순희가 부둣가에 나가서 노래를 흥얼거리며 세월을 보내니 마을 사람들은 혀를 차며 안타까워했다.
부둣가 오른쪽에서 한 남자가 낚싯줄을 드리우고 있었다. 율도리 사람은 아니었다. 때로는 단 한 번도 낚싯줄을 끌어올리지 못하는 날도 있었다. 낚시를 하는 것인지, 그냥 무작정 세월을 낚는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어느 날이었다. 맑던 하늘에 먹장구름이 뒤덮이는가 싶더니 비가 쏟아졌다. 낚시하던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부둣가 쪽으로 왔다.
“야, 너 참 잘 생겼네.”
남자는 창휘에게 말을 걸었다. 남자는 비를 맞아 덜덜 떨었다. 그런데도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아부지, 아부지.”
창휘는 생판 처음 보는 남자 앞에서 손뼉을 치며 버릇처럼 아버지라고 불렀다. 영락없이 그 남자를 향하여 부르는 꼴이 됐다.
“죄송합니데이, 얼라가 아무것도 몰라서 하는 말입니더.”
“아기가 참 똘똘하게 생겼네요. 비가 오는데 어서 들어가셔야죠.”
“비가 오니 우린 여기 있어야 됩니더. 우리 얼라 아부지가 돌아올 거니께.”
“아기가 감기에 걸릴 것 같아요. 저도 오늘은 이만 갈 겁니다.”
남자가 서둘러 마을 입구 쪽으로 향했다. 그때 순희가 남자를 잡듯이 말을 걸었다.
“어디 살아예?”
“아, 근처에 살지는 않습니다만, 여길 자꾸 오게 되네요. 경치가...참...쿨럭, 쿨럭.”
남자는 밭은기침을 해댔다.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순희는 남자의 등을 두들겨 주고 싶었다.
“아부지, 아부지.”
창휘는 그런 남자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소리쳤다.
“우리 집에 가서 따끈한 물 한 잔 마시이소.”
“그래도 될까요?”
“하모 예, 언능 우리 집으로 가입시더. 갑자기 비가 오모 우짜라는 깅고?” 순희는 소나기를 원망하듯 하늘을 향해 중얼거렸다. 순희네 집에 당도할 때까지도 남자의 기침은 멈추지 않았다. 순희는 부랴부랴 도라지청을 꺼내 차를 끓였다.
순희네는 해마다 도라지를 심었다. 보랏빛 꽃, 하얀 꽃이 풍선처럼 매달리는 도라지가 해마다 뒷밭에서 하늘거렸다. 꽃봉오리를 맺으면 순희는 그걸 가만히 지켜보곤 했다. 더군다나 박씨가 떠난 후부터 순희는 도라지꽃에 더욱 정을 들였다. 마치 자기 자신을 보는 듯했다. 꽃잎에 있는 핏줄 같은 것도 만져 보고 꽃 속에 얌전히 숨어 피는 속엣꽃도 들여다보곤 했다.
“옴마야, 아무래도 창휘 어매가 정신 줄을 놨는갑다. 맨날 도라지밭에 엎어져 뭘 하는지 모르겠데이.”
뒷밭 너머에 사는 판득이네가 담장 아래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순희는 도라지꽃을 보면 숨을 쉴 수 있었다. 풍선이 터뜨려지듯이 꽃이 벌어지면 꽃 속에 또 다른 꽃이 숨어 있었다. 도라지만 주야장천 쳐다봤던 순희는 그걸 발견했다. 손톱보다 작은 다섯 가닥 수술이 암술을 감싸 안은 모습이 정겨웠다. 순희도 한 때 박씨에게 도라지 꽃 속에 있는 암술처럼 소중한 존재였다. 순희는 도라지 뿌리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래도 ‘도라지 도라지 백도라지 심심산천에 백도라지.'라고 노래를 부르며 해마다 도라지를 캤다. 그래서 순희네 정지간에는 오래된 도라지 청이 많았다.
“이거 초면에 실례가 많았어요. 아, 도라지 차가 참 진하네요. 칼칼하던 목이 가라앉는 기분입니다. 고맙습니다.”
“이 정도는 맨날 해드릴 수도 있어예. 우리 집에 도라지청 엄청 많십니더.”
그날 이후, 남자는 율도에 올 때마다 창휘와 놀았다. 남자는 창휘에게 목말을 태워 주기도 했다.
“우리 같이 살까예? 내가 매일 도라지 차 끓여 드릴게예. 우리 뒷밭에 도라지가 참 잘 됩니더.”
“네에? 안 돼요. 저는 안 돼요.”
“와, 예?”
“저는 환자입니다. 그냥 이렇게 한 번씩 보면서 지내요.”
순희는 그 남자를 잘 간호해 주고 싶었다. 순희는 남자를 볼 때마다 안아주고 싶었다. 남자가 안쓰러웠다. 그냥 쳐다만 봐도 안 됐다는 생각이 드는 남자였다. 무엇보다 창휘가 남자를 좋아했다. 순희는 해거름이 되어 돌아가려는 남자를 붙잡곤 했다. 그래서 남자는 창휘와 한두 번 자곤 했다. 도라지 차 덕분인지 남자는 건강이 꽤 좋아졌다. 그러다가 그들은 슬슬 한방을 쓰기 시작했다. 순희가 먼저 남자를 껴안았다. 그렇게 사랑이 무르익어갔다. 남자는 창휘를 잘 챙겼다. 창휘도 남자를 잘 따랐다. 꽁냥꽁냥 지내던 그들에게 딸이 태어났다. 남자가 아기 이름을 청희라고 지었다.
맑을 청, 계집 희.
그 무렵부터 남자는 조금씩 각혈을 보였다. 알고 보니 남자는 만성 폐병 환자였다. 호흡이 곤란한 상태가 올 때면 남자는 가슴을 쥐어뜯었다. 한번 시작한 기침은 몇 시간이 지나도 멈추지 않았다. 그날도 남자는 호흡장애를 느끼며 몇 번이나 괴로워했다. 순희가 도라지 차를 끓이는 동안에 남자는 스르르 눈을 감고 말았다.
청희가 백일도 되기 전이었다.
엄마 톺
▲그림 ⓒAI
#폐병
#도라지차
#백도라지
#밭은기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