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일락(Lilac:연한 보라색, 라벤더보다 더 밝음)
국선 언니와 함께 2층으로 올라왔다. 국선 언니는 연신 훌쩍거렸다. 오만가지 생각을 다하며, 내가 엄마 방문을 열었다. 엄마가 우리를 빤히 쳐다봤다. 그러나 말은 없었다. 뭔가를 짐작한 눈치였다.
“국선 언니가 왔어요.”
“뭐라꼬? 그라모 니가 정국선이 맞나? 하나만 물어볼게. 쾌생 의원 집 딸 맞제?”
“...”
국선 언니는 묵묵부답이었다.
“말해봐라. 맞제?” 엄마가 다그쳤다.
“제 본명이 노창선이라고 했어예.” 언니가 끌려온 죄인처럼 본명을 아뢰었다. 그러자 엄마가 큰 소리로 말했다.
“저 가시나가 와 저기 서 있노? 어이고, 이렇게 만나네. 내 딸 맞네. 창선이, 그 불쌍한 것. 핏덩어리였을 적에 내가 버린 내 새끼 맞구만.”
울고도 남았을 상황인데도 엄마는 울지 않았다. 언니도 엄마를 껴안지 않았다. 참 건조하고 밋밋한 상봉이었다. 침묵이 흘렀다. 아무도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어색한 공기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답답함으로 숨 쉬기가 힘들 지경일 즈음에 언니가 돌변했다. 언니가 코뿔소 같은 포즈를 취했다. 언니는 마치 정신 나간 사람 같았다.
“우짤랑기요? 말해보소. 얼라를 남의 집에 보낸 사람이 할 말 있능교?”
“미안타.”
“미안한 마음은 눈꼽만치도 없어 보입니더. 이제 나타나서 우짜겠다능교?”
“미안타.”
“미안하다고 해서 될 일이 아입니더. 나는 고마 콱 죽어 버릴랍니더. 엄마를 만난 날이 내 제삿날이네예. 엄마는 내 인생에 도움이 안 됩니더. 내 인생을 다 조져놓고, 내 사랑도 물거품으로 만들고... 엄마는 내게 엄마가 아니라 천하에 웬수라예. 나는 못 삽니더. 엄마 앞에서 콱 죽어삘랍니더.”
언니 입가에 허연 거품이 보였다. 언니는, 단전 호흡하듯 속에서 끌어올린 소리로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저러다가 언니가 까무룩할 것만 같았다.
“미안타.”엄마는 그 말만 반복했다. 내 귀에도 엄마가 하는 말은 영혼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언니가 패악을 떨며 하는 말속에 내가 하고 싶은 말도 많았다. 언니에게 공감이 갔다. 그건 오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엄마는 우리 삼 남매에게 미안해야 하는 사람이다. 엄마가 우리를 키우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보낸 것에 대한 어떤 변명도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걸 받아들일 마음의 여유가 우리에게 있을 리 없다.
국선 언니는 몸을 비틀거리며 자기 방 쪽으로 갔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살림살이를 다 내동댕이쳤다. 국선 언니가 실성한 듯했다.
“아 씨발, 좃나 더러븐 세상이네. 이번 생은 되는 기 하나도 없네. 쾌생 의원을 유지라고 사람들이 굽신거렸지만 나는 알고 있었지, 얼마나 위선적인지. 그 인간이 나를 더듬는데 내가 그 새끼를 아부지라고 부르며 그 집안에 살겠나? 차라리 도망쳐 나와 사는 게 낫지. 그래서 난 차라리 굶어 죽더라도 친엄마랑 살고 싶었어. 근데 왜 나를 버렸냐고요? 내가 무슨 물건이냐고? 내 인생 다 물어내요. 당신은 내 엄마가 아니야. 엄마라면 자식 못 버리지." 언니가 잠시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다가 대사를 외우듯 또 말을 쏟아냈다.
"나를 버리고 어느 놈한테 붙었능교? 또, 야들은 도대체 뭔기요? 창휘랑 청희를 어디서 씨를 받은겨?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고요. 몰라, 몰라, 나 콱 죽어버릴 거야. 부끄러워서 못 살겠네. 내 엄마라고 하지도 마이소. 나는 그런 엄마 둔 적 없어예.”
그때 오빠가 국선 언니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국선 언니를 꽉 껴안았다.
“누나, 정신 차려. 이러면 안 되지.”
“시끄러. 내가 너를 얼마나 사모했는지 니는 알잖아? 그런데 이제 다 틀렸어.”
언니가 주저앉아 큰 소리로 꺼이꺼이 울었다. 그러자 오빠가 언니의 눈물을 닦아주고 다독였다. 언니는 오빠의 품에 안겼다. 언니는 한평생 사모했던 창휘 오빠에게 마침내 안겼다.
“아, 난, 니가 이렇게 좋은데, 우린 안 되는 사이였네? 내가 눈이 멀었나 보네.”
언니가 오빠에게 다정하게 기대어 안겨있는 장면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나는 차라리 고개를 돌렸다. 나도 오빠에게 다가가고 싶었다. 모든 게 혼란스럽고 두려웠다. 이런 내 마음을 진정시킬 곳은 오빠 품뿐이었다. 그러나 오빠 품에는 정작 언니가 안겨 있다.
언니는 언니대로 소리치고 엄마도 언니에게 퍼부었다. 감정이 사라진 듯한 엄마에게 화를 내는 감정은 여태껏 남아 있었나 보다.
“미친년, 어디 근본도 없는 것이 나잇살을 처먹고 하는 모양새가 그 따구여? 이 가시나를 어디에 써먹겠노? 지 복을 지 발길로 찬 거네, 정의원네 그 많은 재산이 몽땅 지 것인데... 그래, 집을 나와? 복 없는 년은 엎어져도 코가 깨진다 캤다. 니 땜새 내 인생도 요절났다 아이가? 니를 낳아서 내 인생이 다 삐끄러졌단 말이다. 니도 내 인생 물어내라. 물어내라. 물어 내.”
전쟁은 전쟁도 아니었다. 누가 볼까 봐 창피했다. 아, 우리 가족의 얽히고설킨 내력을 커다란 이불로 가리고 싶었다. 꿈이기를 바랐다. 기쁨이어야 하는 날이 아픔이요, 눈물이니, 인생 앞에서 배반당한 기분이었다.
“아, 그만 좀 하세요. 남 부끄러워요.”
내가 소리쳤다. 그리고 나도 언니처럼 주저앉아 울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슬픔과 억울함이 뒤섞인 짭짤한 눈물이 계속 나왔다. 오빠는 세 여자 앞에서 엉거주춤했다. 그러다가 오빠의 발길이 내게로 향했다.
“청희야 울지 마라.” 오빠는 항상 내게 다정했다. 오빠가 나를 안았다. 오빠의 가슴은 구름처럼 포근했다. 그대로 잠들고 싶었다. 세상이 그 순간에 그대로 끝나버렸으면... 오빠도 울고 있었다. 오빠 얼굴에 눈물이 번지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힘들었고, 모두 울고 있었다. 네 개의 저울 접시에 각각의 아픔을 올려놓는다면 저울은 팽팽하게 균형을 맞춘 후 멈출 것 같았다. 그래도 오빠의 마음이 그중 가장 힘들지 않을까? 오빠 품에 안긴 그 찰나에, 엄마의 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정신 채려라. 이것들아.” 엄마가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엄마는 울지 않았다. 엄마 마음은 꽁꽁 얼어붙은 겨울이었다.
엄마의 감정은
모조리 다 말라버린 게
틀림없다.
▲그림 ⓒ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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