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트 그린(Mint Green:상쾌하고 청량한 녹색)
다시 날이 밝았다. 모두 눈이 부어 있었다. 울어서 눈이 붓기도 했겠지만 잠을 못 자서도 그랬을 것이다. 다들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나 보다. 나는 국선 언니 방에서 잤다. 언니를 몇 번 토닥여 주었다.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던 엄마의 눈이 많이 부어 있었다는 것은 아이러니였다. 엄마는 눈물 없이 우는 사람이었다.
서로 쭈뼛거리기만 했고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아침은 그냥저냥 마트에서 챙겨 온 것들로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 표정들이었다. 멘붕상태였다. 어쨌거나, 언니는 감정을 많이 추스른 듯했다.
“다 모여 봐라. 우리.”
언니가 ’ 우리‘라고 했다. 맞다. 우린, 우리다. 엄마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야 할 우리다. 언니가 오빠 아지트 방으로 들어가자고 했다. 언니는 사뭇 진지했다. 방에 들앉자마자 오빠 향이 확 풍겼다. 방 안은 방음벽 처리가 되어 있었다. 녹음실 스튜디오 수준이었다. 오빠는 그 방에서 홀로 딴 세상을 살았겠지. 그 방에서 히키코모리로 살았겠지.
“어, 드럼도 있네? 이 방, 참 좋다야. 우리 노래나 한 곡씩 부를까? 다들 살아온 인생, 그거 잠시 제쳐두고 노래 한 판 부르세. 난, 드럼칠 수 있어.” 언니는 방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텐션이 올라갔다. 언니의 음악적 세포가 마구 일어서고 있었다.
“그래요, 우리 각자 인생곡을 불러보기로 해요. 그게 열 마디 말보다 낫겠어요.” 나는 언니 말을 거들었다.
“하모, 그란디, 나도 노래로 살아왔구마. 노래 없었으모 숨도 못 쉬었을 기라.” 엄마가 다소 크게 말했다. 엄마가 웃지는 않았지만, 목소리는 한결 가벼워졌다.
“창휘, 니 노래 실력은 익히 알지. 우리 각자 맘을 담아 노래 한 곡씩 뽑아 보자. 내가 먼저 부를게.” 언니는 관종이었다. 언니 자신이 먼저 노래를 부르겠다고 설레발치는 걸 보면 그렇다. 그때였다. 엄마가 자리에서 별안간 일어났다. 엄마에게 그렇게 재빠른 구석이 있었다니.
“너거들 가마이 있어봐래이. 내가 장구를 들고 오꾸마.”
엄마는 옆 방에서 장구를 챙겨 왔다. 나도 슬그머니 가방 안에서 미니 하모니카를 꺼냈다.
“엄마가 먼저 불러 봐요. 제일 좋아하는 노래 부르시면 돼요.”
오빠가 노래방 기계 리모컨을 들고 말했다. 엄마는 노래 부르는 것을 사양하지 않았다.
“나는 ‘한오백년’을 부를꾸마." 전주가 시작되는 순간, 엄마는 장구채를 툭툭 치며 노래에 시동을 걸었다. 추임새도 넣었다. 언니는 드럼을 쳤다. 오빠는 기타를 둘러맸다. 나도 미니 하모니카를 뿝빠뿝빠 불었다.
엄마는 장구를 맨 채로 덩덕쿵, 덕쿵, 장단으로 눈을 감고 노래했다. 엄마는 스탠드 마이크 앞에서 한을 토해냈다. 엄마 노래 실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엄마는 한을 있는 대로 쏟아냈다.
한 많은 이 세상, 야속한 님아, 정을 두고 몸만 가니 눈물이 나네.
다음은 국선 언니 쪽에 마이크가 세팅됐다.
“난 평생토록 한 남자만 바라보고 살았어. 노래 한 곡 뽑아 볼게. ‘난 널 사랑해!’라는 노래가 내 18번 곡이랑까. 이 노래를 부른 후에 이젠 내 사랑을 거둬들일게. 남자를 잘못 골랐네. 내 눈이 똥눈이었구만."
언니가 노래를 시작했다. 언니는 드럼채를 내동댕이치고 마이크를 잡더니 허스키한 목소리로 내질렀다. 언니 볼에 주르르 눈물이 흘러내렸다. 언니는 오빠에게 손가락질하는 제스처를 했다.
수많은 시간 헤매며 방황했던 지난 날들
난 널 사랑해, 너의 모든 몸짓이 큰 의미인 걸
오빠 차례였다. 오빠는 무슨 노래를 부를까? 오빠가 리모컨으로 자신이 부를 노래를 세팅했다.
"난, 항상 이 노래를 부르며 살았어. 내 인생곡은, ‘내 생에 단 한 번만이라도 그대를’ 이란 노래야."
멋진 나의 오빠가 내 앞에서 노래로 사랑을 고백하려나 보다. 이룰 수 없는 사랑 앞에 우린 어찌해야 할지. 오빠 맘도 마찬가지였을까? 아니면 오빠는 냉정히 마음을 정리했을까? 그게 가능한 일일까?
"너가 떠난 후에 항상 불렀는데... 내 인생곡이 빛을 보는 날이네."라고 오빠가 농담하듯 말했다. 그런 말을 하는 마음이 어떨지 짐작이 갔다. 언니 맘도 또한 무너져 내리고 있을 것이다. 오빠가 부르는 노래는 내게 익숙지 않은 것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가사가 잘 들렸는지도 모른다.
내 생에 단 한 번만이라도 그대를
단 한 번만이라도 그대를
사랑하게 하여주
내 생에 단 한 번만이라도 그대를
내 순서였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고 천 번 만 번 불렀던 노래다. 내 인생곡은 '총 맞은 것처럼'이었다. 미니 하모니카로 전주와 간주를 하고 싶었다. 그럴 동안에 반주기 소리를 줄여 달라고 오빠에게 부탁했다. 엄마는 어떤 노래라도 듣기만 하면 리듬을 탔다. 곧바로 장구로 박자를 맞췄다. 언니도 마찬가지였다. 오빠도 내가 인생곡을 말하자 냅다 기타 코드를 잡았다. 우리는 음악 가족이었다. 아무도 노래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무대만 만나면 노래를 부르고 싶은 DNA를 가진 가족이었다. 노래며, 악기며, 모두 아마추어 수준을 넘었다. 그나저나 내가 울지 않고 이 곡을 끝까지 부를 수 있을지.
이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숨을 쉴 수 없었다. 마치 나를 위해 만들어진 노래 같았다. 어느 날, 과일을 사러 갔었다. 그 과일가게에서 수박을 90%나 세일한다고 했다. <★ 백지영 컴백 기념! ★>이라고 유리창에 POP글씨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그걸 보는 순간, 나는 풉하고 웃고 말았다. 그 과일장수도 나만큼이나 백지영 노래를 좋아하는 '백지영 가수 덕후'였다.
구멍 난 가슴에 우리 추억이 흘러넘쳐
잡아보려 해도 가슴을 막아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심장이 멈춰도 이렇게 아플 것 같진 않아
어떻게 좀 해줘, 날 좀 치료해 줘
이러다 내 가슴 다 망가져, 구멍 난 가슴이
사랑, 그것 참 쉽지 않다.
남들은 그냥 하는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앞에
노래로 울고 있는 우리였다.
▲그림 ⓒAI
(그런데 이게 PC에서는 재생이 되는데 폰에서는 안되네요 ㅠㅠ 브런치 문제인 듯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앱에서는 이 링크가 폰으로도 재생이 잘 되거든요.)
엄마: 한오백년
https://www.youtube.com/watch?v=nO1frAt2P7E&list=RDnO1frAt2P7E&start_radio=1
언니: 난 널 사랑해
https://www.youtube.com/watch?v=zGexcMAdvvM&list=RDzGexcMAdvvM&start_radio=1
오빠: 단 한 번만이라도 그대를
https://www.youtube.com/watch?v=Sl2GsL-b6Vg&list=RDSl2GsL-b6Vg&start_radio=1
나의 노래: 총 맞은 것처럼
https://www.youtube.com/watch?v=sBwccnWlO_w&list=RDsBwccnWlO_w&start_radio=1
#한오백년
#난널사랑해
#내생에단한번만이라도그대를
#총맞은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