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여행기자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성균 여행기자 Oct 05. 2019

결항은 처음이라

2년 만의 제주, 태풍 타파가 알려준 결항에 대처하는 방법

제주도는 내게 특별한 여행지다. 고등학교 1학년 수학여행에서 에메랄드 빛의 협재해변을 본 이후로 제주도는 내 마음속에 언제나 환상의 섬으로 기억됐고, 품고 싶은 여행지였다. 또 그때부터 산보다 바다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20대 취업 준비를 하며 틈틈이 여행을 다닐 때마다 언제나 1순위는 제주도였는데, 2015~2016년 2년 동안 15번 이상 방문하며 제주의 풍경과 맛을 속속들이 탐구했다. 이러한 이유로 제주도는 내 여행 인생의 출발점이자 한국에서 가장 좋아하는 여행지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2017년부터 2018년까지 우리나라에 해외여행 열풍이 불었고, 나 또한 편승해 일본 등 단거리 여행과 장거리 출장을 번갈아 가며 제주도를 소홀히 했다.

다만 올해는 정부의 정책 중 하나인 중소기업 지원 사업인 '근로자 휴가 지원사업'의 혜택 사용과 연차 소진을 이유로 지난달 2년 만에 제주도를 가게 됐다. 이상하리만큼 설레고 떨렸다. 첫사랑을 만나러 가는 길처럼 김포공항으로 향하는 순간부터 두근거림이 주체가 되질 않았다.

태풍이 닥치기 전 제주도는 평화로웠다. 바람은 조금 거셌지만 여행하기 딱 좋은 날씨였다. 도착하자마자 첫 목적지인 애월읍으로 향했고, 애월의 풍경을 즐길 수 있는 카페에서 커피 한 잔 마시며 제주의 바람을 느꼈다. 탁 트인 곳에서 바다 풍경을 즐기니 앉아만 있어도 배시시 웃음이 났다. 이런 제주를 2년 만에 오다니. 내가 잘 못했다.

태풍이 근접하고 있었지만 9월20일 금요일의 제주도는 걷기 좋은 날씨였다. 조금 격하게 걸으면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지만 잠시만 의자에 앉아도 시원한 바람에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 또 애써 꾸미지 않아도 좋은 날처럼 여행을 위해 무언가 노력하지 않아도 모든 게 눈부셨던 시간으로 하루를 채웠다. 특히 오랜만에 왔다고 제주도가 격하게 반겨주는데, 이 화려한 일몰은 가히 '역대급'이라는 수식어를 붙일만했다.

처음에는 주황빛이 살짜기 구름을 통해 얼굴을 비추더니 5분 10분 지날수록 남색, 보라색, 주황빛이 마구 뒤섞여 황홀한 시간을 선사했다. 제주도를 20번 가까이 왔지만 이런 호사는 처음 누렸다. 그다음 날부터 30시간 연속 비가 왔지만 이 한순간 덕분에 이번 제주도 여행의 풍경은 완벽하다고 말할 수 있다.  

9월21일 토요일 새벽부터 빗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제주도가 제17호 태풍 타파의 영향권에 본격적으로 들어가며 하루 종일 비가 오기 시작했고, 22일 일요일 오후 4시까지 한 번을 그치지 않고 쉴 새 없이 내렸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결항 이야기다. 수십 번의 여행 중 처음으로 만난 비행기 결항이다.

22일 새벽 5시30분 범상치 않은 빗소리와 강풍에 마음의 준비를 했다. '아 오늘 집에 가긴 글렀구나.' 22일 오후 5시40분 진에어 항공편의 결항 소식이나 대체편을 알아보기 위해 콜센터 업무 시작 시간인 오전 6시를 차분하게 기다렸다. 콜센터 번호를 미리 찾아놓질 않아 잠깐 늦장을 부렸고, 무려 2분이나 늦게 전화를 걸었다. 설마 했지만 연결이 되질 않는다. 40분 동안 기다렸지만 결국 닿지 못했다. 누구를 탓할 수가 없었다. 최소 1,000명 이상의 제주 여행자가 전화를 했을 것이고, 국제선까지 담당하려면 현재의 인력으로는 감당하기 힘들 테니.

다음 순서는 공항이다. 무조건 나가보는 것이다. 해장국으로 아점을 든든하게 해결하고 공항으로 갔다. 이미 오전 비행기의 전체 결항이 공지된 상황이었고, 대체편을 구하기 위한 수많은 여행자들이 긴 대기줄을 형성했다. 진에어 카운터에서 내 차례를 기다렸고, 일단 오후 비행기는 결항이 공지된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스케줄을 변경할 경우 수수료가 발생한다고. 섣불리 바꿀 수 없었던 건 오후 5시40분에 기적처럼 비행기가 뜰 수도 있다는 내 바람 탓이었다. 1차 공항 방문은 그렇게 허무하게 끝났다.



다음날 취재를 위한 행사와 인터뷰가 있어 걱정은 커져갔다. 잠시 여행 기분을 낼 겸 커피를 마시러 이동했지만 불안한 마음에 결국 다시 공항으로 돌아왔다. 제주공항 4층 롯데리아에서 결항이 결정되는 오후 3시까지 머무르기로 했다. 월요일에 마감해야 할 기사를 쓰기 위해 노트북을 펼쳤지만 진정되지 않는 마음 탓에 손이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소프트콘도 바닥에 떨어트렸다. 이런 일은 처음이라 의연하지 못했다.

오후 3시 결국 결항 확정. 안내 문자가 왔는데 9월24일 화요일 저녁 비행기에 배정됐단다. 이게 무슨 말이지. 내게 남은 연차는 0.75개. 이틀을 제주에 묶여야 하는데, 이 상황을 회사에 어떻게 알리지? 당황을 숨기지 못한 채 빠르게 카운터로 이동했다.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 행사와 인터뷰는 후배 기자에게 가야 할지도 모른다고 연락을 취했다. 주말에 연락이라니. 미안함에 온갖 약속을 남발하며 어쩔 줄을 몰랐다.

화요일까지 자리를 비우는 건 진짜 무리다. 어떻게 해서든 월요일에는 서울로 가야 했다. 빠른 걸음으로 다시 줄을 섰다. 우선 동행한 친구의 비행기는 월요일 저녁 8시30분이었는데, 안 되는 줄 알면서도 혹시 친구와 비행기표를 바꿀 수 있는지 바보 같은 질문을 했다. 당연히 돌아오는 대답은 'NO'

직원에게 약간 빌듯이 월요일 아무 시간대 비행기 없냐고 물었고, 직원은 난감하듯이 뒷단과 이야기를 나누다 돌아왔다. 짧은 것 같았지만 정말 길게 느껴졌다. 다행히 저녁 8시30분 비행기가 있단다. 서둘러 자리를 확정하고 일단 한숨 돌린다. 화요일에는 출근할 수 있겠다.

이제 다음 단계가 남았다. 회사에 어떻게 알리지? 일단 머리가 너무 아프고, 배도 고파 카페인 충전 겸 허기를 달래러 길을 나섰다. 비와 바람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진에어는 결항 확정을 다른 항공사에 비해 천천히 공지했다.

따뜻한 플랫 화이트 한 잔에 마음을 추슬렀고, 회사에 보낼 메시지를 기사만큼 한 땀 한 땀 정성 들여 작성했다. 이런 건 또 처음이라. 전후 사정과 다음 주 마감 일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친구의 컨펌을 받아 부국장님에게 전달했다. 이제 기다리는 일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제 없다. 이 맛있는 커피를 여유 있게 즐기면서 조금 더 생긴 제주여행의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고민했다. 우선 바다를 보러 가자.

마음을 녹였던 노형도 플랫포 로스터리 카페의 플랫 화이트

비는 살짝 잦아들었지만 바람은 여전히 강했다. 친구는 이미 오늘 저녁에 묵을 방을 구했는데, 나는 월요일 새벽에 공항에 나가 더 일찍 출발할 수 있는 비행기를 신청하기 위해 제주시에 머물 생각이었다. 친구가 이해해준 덕분에 제주시에 다시 방을 구했고, 저녁 먹을 장소도 최종적으로 선택했다.

회사로부터의 답변을 제외한 모든 일들이 해결되자 긴장이 풀렸고, 몸이 으슬으슬하니 감기 기운이 습격했다. 여기서 감기 걸리면 망하니 서둘러 약국에서 약을 사 먹었고, 최대한 즐거운 저녁 시간을 보내기 위해 노력했다. 소주 한 잔 위에 적시는 순간, 회사에서도 나의 상황을 이해해주는 문자를 보내줬다. 이렇게 결항 사태는 종료됐고, 내게 제주도에서 머물 24시간이 더 주어졌다.

여전히 강한 바람. 파도가 제주를 삼킬 것만 같다.

2박3일 일정이 어쩌다 3박4일 일정이 됐지만 내가 처리해야 할 월요일 업무는 여전했고, 부담감은 컸다. 우선 새벽에 공항으로 나가 스케줄을 바꾸는 수밖에.

9월23일 월요일 아침이 밝았다. 6시가 딱 되자마자 진에어 콜센터에 전화했고, 이번에 연결해 성공했다. 오전 8시10분 비행기로 바꿀 수 있는데, 하필 내가 끊은 티켓이 보너스 티켓이라 재발권은 불가능하다고. 구매해야 한단다. 잠시 고민하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바로 진에어 홈페이지에 들어가 아침에 출발하는 비행기 티켓을  구매했다.

그리고 공항으로 서둘러 이동했다. 수수료가 발생하더라도 기존에 갖고 있던 저녁 비행기 시간을 바꿀 수 있는지 묻기 위해 다시 줄을 섰다. 직원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시간 변경 요청을 했는데, 빠르게 키보드를 두드리더니 오전 8시 비행기로 재발행을 해준단다. 와! 속으로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이게 가능하네?'

참고로 당일 구매한 비행기표는 환불수수료가 없다. 따라서 오전에 구매한 8시10분 비행기는 환불하더라도 수수료가 0원이다. 마음 편하게 체크인 카운터에서 수하물까지 맡기니 긴박했던 어제도 즐거움으로 다가왔다. 오후에 예정된 모든 일정들을 진행할 수 있게 되니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 다이내믹한 3박4일의 제주 여행은 결국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렸다.

기적적으로 월요일 반차만 활용해서 결항 사태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이번 여행으로 결항을 대처하는 방법을 몸소 익혔다.


1. 결항이 예상되면 우선 공항으로 가서 상황을 파악한다.

2. 결항이 확정되면 빠르게 대체편을 예약할 수 있도록 공항 카운터로 향하자.

3. 원하는 시간이 아니라면 재차 공항 카운터에서 비행기 시간을 확인해보자.

4. 결국 답은 공항에 있다.

5. 혹시 모르니 당일 비행기 표를 구입할 수 있는지 수시로 항공사 또는 여행사, OTA에서 항공권을 검색해보자.

6. 당일 구매 항공권은 수수료 없이 환불할 수 있다.


실제로 8시 비행기를 타니 비상구를 비롯해 몇몇 자리가 공석으로 남아 있었다. 아마도 응급환자를 비롯해 정말 급하게 이동해야 할 사람들을 위한 자리를 끝까지 남겨두는 것 같다. 따라서 공항에 마련된 결항 카운터에 꾸준하게 방문하면 조금이라도 앞당길 수 있지 않을까 싶다.

9시30분경 무사히 서울에 도착할 수 있었고, 태풍이 지나간 자리를 가을이 성큼 다가와 채우기 시작했다. 파란 하늘이 반겼고, 선선한 바람이 살결에 기분 좋게 닿았다. 예정에 없던 일들과 함께한 3박4일 제주여행은 제주를 다시 바라보게끔 만들었다. 오랜만에 찾아왔다고 제한된 시간 속에서 내게 보여줄 수 있는 최대한의 모습들을 선사했고, 황홀한 일몰과 거센 태풍 등으로 격하게 맞이해줬다. 게다가 이제 2019년, 그리고 2010년대가 3개월밖에 남지 않았다. 2020년대의 시작이 코앞으로 다가왔으며, 2020년 여행길에는 제주가 또 한 번 큰 족적을 남길 것 같다. 내 여행 첫사랑 제주, 다음에 또 보자.


*2년 만의 제주를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준 여행 파트너에게 감사하다.

*17호와 18호 태풍에 피해를 받은 모든 분들이 빠르게 일상을 되찾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또 불의의 사고를 당한 모든 분들에게 애도를 표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여행기자는 여행작가가 아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