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담 Oct 01. 2022

브롱스 10마일- 어감은 좋지만 은근히 악랄한 "마일"

뉴욕시티 마라톤 9+1 챌린지, 8번째

요즘은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날씨며 지도며 다 내 취향대로 볼 수 있으니 그런 문제가 없지만,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 미국으로 이민한 한국인들은 아마 골치 깨나 썩었을 것이다. 바로 이 "마일" 단위 말이다.



미국은 지금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미터법을 쓰지 않는 나라다. 1마일은 대강 1.6km정도니까 머릿속에서 대강 계산할때 1.5배정도를 하는데, 1마일보다 짧은거리를 셀때는 좀 복잡해진다. 구글맵을 켜놓고 운전을 하다보면 "1/4마일 앞에서 우회전" 이런소리가 나온다. 쿼터마일, 하프마일은 워낙에 자주 나오니까 외워서 안다고 치면, 이제부터는 200피트 앞, 100피트 앞 이런 소리가 나온다.

@.@

골치아프다.

그래도 거리는 곱하기만 하면 되니 쉬운 편. 화씨온도는 암산으로 계산도 못한다.



하여간 이 마일 단위 때문에 미국에는 좀 독특한 대회들이 있는데, 지난번에 참가했던 1마일 대회도 있고 이번에 참여한 10마일 대회, 그리고 미터법의 나라들이 100km 울트라 마라톤을 하는 동안 무려 100마일(!!!!) 그렇다. 160km 이상을 뛰는 100마일 대회가 있다.



마일을 미터로 일일히 환산하지 말라고 누누히 말하지만,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으니 마음속에선 늘 환산을 한다. 그러다보면 늘 한박자씩 늦게 놀라고 한박자씩 늦게 감탄하곤 하는것이다. 성가셔도 어쩔수가 없다. "쟤 오늘 아침에 18마일 뛰었대" 라고 하는것과 "30km뛰었대"는 일단 앞자리가 1과 3이라니까?!



내가 마일을 매번 미터로 환산하듯 미국인들도 5k, 10k대회를 매번 마일로 환산해 생각한다. 오늘도 아침에 10k 대회때 지급된 티셔츠를 입고 동네를 돌아다니다보니 내 등 뒤에서 초등학생이 10k가 뭐냐고 아빠에게 묻는다. 그리곤 아빠가 열심히 설명을 하는데 결론은 "6 and something 마일"이었다. 미국사람들 정말 그렇게 말한다 10k는 6쩜 어쩌구 마일, 5k는 3.어쩌구 마일...

왜냐!

마일은 십진법 단위가 아니기 때문에 마일 다음으로 작은 단위인 "피트"가 100이나 1000으로 딱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5280피트가 1마일(ㅜㅜ) 그러니까 정확하게 10km는 6.2마일인데 6마일 + 0.2마일 (1056피트).... 그만하자....



하여간 어감은 뭔가 귀여운 "스마일~" 같은 느낌을 주면서 굉장히 악랄한 단위 되겠다. 그리고 하필이면 이 마일이 1.6km나 되는 바람에 미터법 세상의 사람들이 100km를 뛰고 성취감을 느끼는 동안 이들은 160km를 뛰어야 직성이 풀리게 되었으니 극악무도하기까지 하다.

100Km를 뛰는것도 충분히 무모한데 160km라니. 차로 가도 몇시간은 가야할 거리인데....




2022년 브롱스 10마일 대회 코스 맵 .브롱스 최대의 핵심 시설인 양키 스타디움 앞에서 출발해 북쪽으로 올라갔다가 다시 되돌아오는 코스다.



하지만 이렇게 성가신 마일 단위에도 좋은점은 하나 있는데 바로 심리적으로 가볍다는 점이다. 16km와 10마일은 같은 거리지만 기분상 10마일이 가볍다. 마치 10km를 뛰는 듯 "어디 한번 뛰어볼까" 하는 마음이 그나마 수월하게 먹어진다.



게다가 3.몇마일, 6.몇마일 하는 대회만 주구장창 열리다가 (아이러니하게도 달리기의 세계는 미터법이라 제 아무리 미국이어도 주류 대회는 5k, 10k다) 이렇게 딱 떨어지는 [10마일]이라고 하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숫자란 말인가. 왠지 심리적으로 부담감이 생기는 하프마라톤(13.1마일)보다는 짧고, 10k(6.2마일)같은 이상한 숫자도 아닌 10마일. 그래서 그런지 만2천명이나 참가하는 성대한 대회가 되었다.




브롱스는 도로도 건물도 큼직큼직하다. 이번에 지급된 빨간색 기념티를 입은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뉴욕시티 마라톤을 주최하는 NYRR은 다 계획이 있다. 9월 중순에 10마일 대회를 열고, 10월 중순에 하프마라톤 대회가 한번 있다. 올해 11월 초에 열리는 뉴욕시티 마라톤을 준비중인 사람들은 이 대회를 차례로 뛰면서 컨디션을 맞추면 된다.



대부분의 러너들이 10마일 쯤이야 진작에 진도를 뽑았고, 이날은 대회를 한번 뛴 다음 코스 교통 통제가 풀리기 전에 한번 더 뛰겠다는(!! 도합 20마일) 생각으로 온 사람들도 많았다. 일년 내내 갈고닦은 실력이 정점을 향해 가는 시기라서 그런지 정말 기록들도 좋았다. 내가 2마일 정도 뛰었을때 이미 선두가 반대쪽에서 뛰어오는게 보였다. 내가 선두에 비해 30분 이상 늦게 출발하기도 했지만 고작 2마일 달렸는데 선두가 저쪽에서 오는게 보이다니... 저사람들은 이제 다 뛰고 집에 가겠구나 하는 생각에 부럽기도 하고, 이제 막 출발했는데 다 뛴 사람들을 보니 김이 빠지기도 하고 복잡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반환점을 돌아 되돌아오는 코스를 싫어한다.



컨디션이 많이 안좋아서 천천히 뛰었다. 장거리를 뛴다는 압박감에 왠지 화장실을 미리 가야할것 같아 화장실 줄에 서있었던것도 실수였다. 너무 긴 줄에 서있다보니 내 출발그룹과 함께 출발하지 못하고 2그룹 뒤에서 출발했더니 주변사람들 속도에 말려 점점 더 페이스가 내려갔다. 조금 무리해서라도 앞으로 가고싶었지만 사람이 너무 많아 비좁은 길을 뚫고 나가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내가 대회를 여러번 뛰면서 거의 처음으로 부상자가 실려나가는걸 직접 봤는데 심지어 한두번이 아니었다. 코스가 언덕이 험하지는 않았지만 노면이 나빠서 그랬는지, 마라톤 트레이닝으로 자신감이 과해져서들 그랬는지, 정말 많은 러너들이 코스에서 실려나갔다. 코스 중간중간에 있는 의료 지원 텐트에도 거의 빠짐없이 한두명씩 누워있었다. 그런걸 보니 갑자기 겁이 나기도 하고, 지금 준비중인 하프마라톤 걱정도 되고 해서 나도 모르게 점점 더 속도가 내려갔다.




10마일 까진 아니어도 15km정도는 가끔 뛰는데, 역시나 10마일은 길고 지루했다. 천천히 뛰어서 더 오래걸리고 지루했지만 어찌됐건 멈추지 않고 달리면 언젠가는 끝난다. 달리기를 하면서 배운 너무나도 당연한 진리 중 가장 유용한 진리다. 어찌됐던 끝난다.



골인지점을 통과하니 자원봉사자들이 물에 적신 천조각을 주었다. 머리에 얹어서 열을 식히고 물도 세잔정도 받아서 마시니 살것같다. 브롱스 10마일은 뉴욕시티 5보로우 시리즈이기 때문에 메달이 나왔다.




양키 스타디움 옆에서 휴식을 취하고 과자도 먹고 한숨 돌렸다. 양키 스타디움 역 특유의 고가철도 분위기를 느끼며 메달을 목에 건 러너들이 가방도 찾고 맥주도 한잔씩 하며 분위기를 즐겼다.



그리고 교통 통제가 풀리기 전에 코스를 한번 더 돌겠다던 사람들은 정말로 10마일을 한번 더 뛰러 갔고, 우리 런클럽은 집까지 뛰어가자는 그룹을 결성하고 있었는데... 여보세요 여기는 브롱스에요. 우리가 집까지 가려면 맨하탄을 종단한 다음 다리로 바다를 건너서 브루클린으로 가야한다구요 @.@

하지만 10마일 대회 + 맨하탄 종단 + 다리 건너 브루클린까지를 다 합쳐도 26마일이 안 되니까, 풀코스 마라톤에 미치지 못하는 거리다. 풀코스의 위엄에 새삼 놀라며 조용히 지하철 카드를 꺼내드는 나였다.





뉴욕시를 구성하는 5개의 구(区)에서 각각 열리는 5보로우 시리즈. 나는 그 중 퀸즈 10k와 브롱스 10마일을 완주하고 두개의 메달을 받았다. 보통 메달은 하프마라톤부터 나오지만 5보로우 시리즈는 의미가 특별해서 메달이 나온다. 나머지 3구 (맨하탄, 브루클린, 스테튼 아일랜드)는 하프마라톤이다. 의도치 않게(?) 짧은거리만 뛰고 얍삽하게 메달을 2개나 챙겼지만 내년에는 5보로우 시리즈를 전부 다 완주해보고자 의지를 다져본다.




뉴욕시티 마라톤의 참가권을 받기 위해 1년동안 9번의 경기참여와 1번의 자원봉사를 수행하는 9+1. 브롱스 10마일 대회로 8번째 초록불이 켜지고 이제 딱 한번의 대회가 남았다.


이전 07화 맨하탄 5번가를 있는힘껏 달려보자 - 5번가 1마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