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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담 Apr 29. 2023

거리, 이제부터 "마일"

D-191 중요한 것은 멀지 않다는 마음

내 어린 시절 "미국"이라 함은, 찰리브라운과 스누피가 사는 곳. 조금 더 커서는 베벌리힐즈 아이들이 사는 곳. 그러다가 잠시 CSI로 범죄의 소굴인 줄 알았는데 다시 프랜즈 때문에 꽤나 위트 있는 곳이구나 했던... 그런 나라였다. 물론 내가 여기 와서 살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미국은 너무나도 멀고, 언어도 다르고 사고방식도 다르고, 적응해서 살려면 고생 깨나하겠다 싶었지만 의외로 어려움이 없었다. 뉴욕은 미국이 아니라 그냥 뉴욕이라는 말도 있듯이, 내가 텔레비전으로 봤던 베벌리힐즈 같은 동네도 없었고, CSI에 흔히 나오는 것 같은 깜깜한 밤길에 가로등도 없는 길을 운전해서 다닐 일도 없었다. 그냥 서울에서 사는 것과 비슷한데 조금 더 더럽고 조금 더 작고 조금 더 비싸다 그런 정도였던 것 같다. 물론 다 지나서 하는 말이니 말이야 쉽게 하지만 '조금'이 사실은 '꽤 많이'였음을 부정할 수 없다.



영국이나 일본처럼 차가 반대방향으로 다니는 것도 아니고, 호주처럼 계절이 반대인 것도 아니라서 정말 서울살이와 비슷했다. 기후도 서울이랑 비슷해서 더 그랬다. 미국이면 백인이나 흑인 같은 소위 '외국사람'이 많을 것 같지만 인종적으로 다양한 뉴욕에서는 동양인도 아주 많아서 딱히 내가 혼자만 겉돈다 하는 느낌도 없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그런데 의외의 부분에서 컬처쇼크를 느끼는 계기가 생겼으니 바로 내가 달리기와 운전을 시작한 시점이었다. 미국은 도량형이 달랐던 것이다.



미국에서 11년을 살면서 이 나라 도량형이 우리랑 다르다는 것을 몰랐겠느냐 싶지만, 사실 알 필요가 별로 없다. 내가 미국에 온 해에 애플에서는 아이폰 4가 나왔다. 이미 스마트폰이 당연한 시대가 된 것이었다. 지도도 일기예보도 스마트폰으로 보니, 당연히 거리는 km로 날씨는 섭씨 기온으로 나왔다.




그러다가 운전을 시작했다

고속도로에서 운전을 할 때 시속 80마일로 달리고 있으면 그냥 그런가 보다 싶은데, 그게 시속 130km라는데 생각이 미쳐 등골이 서늘해진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니다.



달리기도 한 몫 했다

혼자서 달릴 때는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남들과 함께 달리기 시작하니 "그들"은 마일, 나는 킬로미터였다. "오늘 ~~ 정도 거리를 뛰자"를 그들은 마일로 말하고, 나는 킬로미터로 계산했다. 사실 마일을 킬로미터로 환산하는 것은 어렵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 문제는 '페이스'다. 1km를 뛰는 데 걸리는 시간을 말하는 '페이스'를 마일에서 킬로미터로 환산하는 것은 10진법과 60진법이 혼용되어 도저히 암산으로는 안 되는 영역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꾸역꾸역 어떻게든 때워보겠다는 생각으로 내 페이스만 달달 외워서 (대회 페이스, 이지페이스, 템포 등등) 어찌어찌 묻어가고 있었는데...



이제는 풀 마라톤을 뛰려고 하니 문제가 복잡해진다. 함께 연습하는 친구들, 연습을 도와주는 코치, 각종 기록과 코스 전략 등등이 다 마일 단위다. 하프나 풀 마라톤 때 코스와 내 체력에 맞게 코치가 짜주는 페이스표도 당연히 마일이다.


하프는 거리가 짧으니 대충이라도 km로 환산해서 따로 만들었는데, 풀코스를 그렇게 하려니 손목에 두 번 감아도 남을 만큼 길어지고 그냥 보기만 해도 '아 저 먼 거리를 어떻게 가나...' 싶다.



그래서 과감히!

매번 환산하는 습관을 버리고 과감히 마일 단위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워치의 거리 단위를 마일로 바꾸는 것은 정말 큰 결단이 필요했다. 왜냐하면 1마일은 약 1.6km이기 때문에 내가 10km를 뛰어도 단위가 마일이면 6마일밖에 안 되기 때문이다. 힘들게 한 시간이나 걸려 10km를 뛰었는데 고작 6이라니. 당장 눈앞에 보이는 허탈한 결과가 싫었다.



하지만 뭐 당연한 거지만, 내가 뛴 거리에는 변함이 없다.

단지 숫자가 작아질 뿐인데 알량한 마음이 그걸 못 참는 거였다. 그런데 의외로 이 단위 문제는 나만 겪는 게 아니라 미국사람들에게도 있었으니, 바로 해외 원정경기 때다. 베를린이나 도쿄 마라톤을 가면 단위가 당연히 km로 되어있는데, 길가에 세워진 거리 마커에 [30km] 이렇게 나와있는 걸 보면 지레 겁이 나고 힘이 든다고. 마라톤 풀코스 42.195km는 마일로 환산하면 26.2마일 밖에 안 되기 때문에 미국사람들 입장에선 30이라는 숫자는 마라톤 코스에서 본 적도 없는 숫자다. 인간이 마라톤 2시간의 벽을 깨지 못하는 것은 신체의 문제가 아니라 멘털이라는 게 학계의 정설이듯이, 당장 눈앞에 보이는 숫자가 주는 위력은 엄청나다.



그래서 나도 생각을 바꿔 "물 반잔 전법"을 쓰기로 했다

 "10km나 뛰었네. 힘들다"가 아니라 "6마일밖에 안 뛰었네. 한참 더 뛸 수 있겠어"로 바꾸는 것이다.


같은 거리지만 km에서 마일로 바꾸면 숫자가 확 줄어든다

18km는 11.4마일이다.

20km 가까이 뛰었네!! 너무 힘들다. 가 아니라

10마일 정도밖에 안 뛰었네. 할만하다.로

워치의 거리 단위 설정을 바꾸고 나의 사고방식도 바뀌었다. 40년을 운동 한번 안 하고 살아온 몸뚱이로 풀코스 마라톤에 도전하는 것은 모든 것을 부수고 새로 쌓는 과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온몸을 부수고 새로 짜 맞추고, 생각도 다 허물고 새로 만들어간다.




중요한 것은 멀지 않다는 마음

26.2마일 별거 아니라는 마음.

긍정적인 생각과 꾸준한 연습을 반복하다 보면 반드시 완주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



그렇게 오늘도 뉴욕시티 마라톤의 출발선에 한걸음 더 다가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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