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담 Jun 13. 2023

캐나다 산불연기 속 트레드밀의 재발견

뉴욕마라톤까지 D-150

그날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아침이었다. 6시 반에 잠을 깨는 나는 침대에서 발목을 까딱거리며 종아리 스트레칭을 하면서 스트라바를 켜서 누가 얼마큼 뛰었나를 구경한다. 삭신이 쑤시고 피곤해 죽겠다 하다가도 남들이 뛴 기록을 보면 나도 뛰고 싶은 의욕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트라바에 너도나도 빨간 해 사진을 올려놓고 오늘 해 색깔이 이상하다고 난리다.



그저 날씨가 흐린가 하고 생각했는데, 확실히 해 색깔이 이상하긴 이상했다. 빨간색도 아니고 핫핑크?!

그리고 몇 시간 후, 기상청에서 뉴욕 전 지역에 공기질 경보를 내렸다. 캐나다 산불 연기 사태의 시작이었다.



필터를 적용한것처럼 보이는 사진은 사실 그냥 찍은 사진이다... 공기질 지수는 300을 넘어 위험수준까지 갔지만 그게 끝도 아니었고 결국은 400을 넘었다.

처음엔 그저 몇 시간 그러다 말겠거니 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공기질 지수는 점점 더 나빠지고, 뉴욕은 전 세계에서 가장 공기질이 나쁜 도시가 되었다 (!!) 

공립 초등학교는 원래 일정상 휴일이었지만, 중고등학교는 아니었는데 임시 휴교령을 내리고 원격수업으로 전환되었다. 묘하게 2020년 봄을 떠올리게 하는 상황에 뉴요커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평일 저녁시간대에 잡혀있던 대회들도 취소되고 그룹런은커녕 개인적인 달리기도 자제하라는 연락이 오고 갔다. 그냥 바깥을 보기만 해도 달리기를 할 때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집 안에서도 눈물이 나고 집 밖으로 나가자마자 기침이 쉬지 않고 나올 정도였다. 캐나다가 아니라 바로 옆동네에서 불이 난 것처럼 연기 냄새까지 났다. 



하지만 우리는 또 세계에서 가장 심하게 코로나 폭격을 당했던 시민들 답게 (ㅜㅜ) 너도나도 N95(KF94) 마스크를 싸들고 다니며 서로서로 나눠주는 등, 공기 재난 경력직다운 면모를 보이며 슬기롭게 하루하루를 대처해가고 있었는데... 



문제는 이게 3일 이상 지속되니 달리기쟁이들은 다리가 아파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좀이 쑤시다 못해 아픈 그 느낌이 스멀스멀 올라올 때쯤. 나도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어 YMCA로 향했다.




그렇다. 트레드밀을 뛰기 위해서다. 아니나 다를까 평소에는 텅텅 비어있는 트레드밀 빼곡히 사람들이 뛰고 있다. 겨우 한자리 얻어 나도 운동을 시작해 본다. 



나는 달리기를 코로나 때 시작한 사람으로, 나이키 런클럽 퍼플 레벨이지만 트레드밀을 뛰어본 것은 한두 번 정도..? 겨울에 눈이 오랫동안 내릴 때나 너무 추운 날이 계속될 때는 한번 뛰어볼까 싶다가도, '로드러닝과 트레드밀은 다르다. 쓰는 근육부터 다르다.'라고 인터넷에 구구절절이 남겨주신 선배님들의 말씀을 기억하며, 트레드밀을 뛸 바에야 안 뛰고 만다는 생각이 어느 정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번에는 사태가 사태인 데다, 치명적인 것은 "공기질 경보가 언제 해제될지 장담할 수 없다"는 거였다. ㅠㅠ 원래 뉴욕은 바람이 그쪽에서 불지 않는데 독특하게도 캐나다에서 뉴욕 방향으로 바람이 불고 있었고, 산불은 수습불능 상태. 

그러니 마냥 쉬고 있을 수는 없고, 원래 바깥에서 망아지처럼 뛰어다니던 사람을 뛰지 못하게 한 정도가 아니라 집콕을 시켜놓으니 도저히 좀이 쑤셔서 안 되겠으니 '트레드밀이라도 뛰자!'가 된 것이다.



그래서 이왕 뛰는 김에 '로드러닝과 트레드밀은 다르다'가 대체 왜 나온 말인지, 온몸으로 느껴보기로 했다. 특히 나처럼 로드에서만 뛰고 트레드밀을 거의 안 뛰어 본 사람은 그 차이가 더 크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1. 근력을 덜 쓴다

다른 무엇보다도 트레드밀 러닝의 다른 점은 다리로 힘을 쓸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로드에서 달릴 때는 발이 땅을 차고 뒤로 미는 힘, 그 반동으로 몸이 앞으로 나간다. 장거리 달리기의 기본자세는 몸이 상하로 심하게 움직이지 않게 하면서 발을 뒤로 세게 미는 것이다. 한정된 나의 힘을 쓸데없이 몸을 위아래로 움직이는데 낭비하지 말고 오직 앞을 향해서만 가도록 힘을 수평방향으로 얼마큼 효율적으로 쓰느냐가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트레드밀은 벨트가 자동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내가 뒤로 밀어줄 필요가 없고, 발을 공중으로 들어 올리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너무 쉽다...?라고 하기엔 이건 완전히 다른 종류의 운동이라고 봐야 한다. 발로 땅을 미는 운동과 발을 들어 올리는 운동은 아예 다른 것이다. 팔 굽혀 펴기와 턱걸이가 똑같은 팔운동이 아니듯이 말이다.




2. 일정 속도 유지

또 하나 큰 차이점이라면 로드러닝은 속도 조절을 내가 알아서 하지만, 트레드밀은 기계의 속도에 맞춰야 한다는 점.

트레드밀도 속도를 조절할 수는 있지만 한창 현란하게 발재간과 팔 치기 멀티태스킹을 하다 보면 웬만해선 속도를 올렸다 내렸다 하기보다는 그냥 한번 정한 속도로 뛰게 마련이다. 



하지만 로드에서 뛸 때는 너무 힘들다 싶으면 나도 모르게 느려지기도 하고, 내리막에선 빨라지고 오르막에선 느려지고, 딴생각하다 보면 느려지고 하여간 변수가 많다. 지형과 조건에 관계없이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는 것도 아주 중요한 기량이기 때문에 평소 로드에서 달릴 때는 수시로 시계를 확인하면서 속도조절을 해야 하지만! 모든 것은 정신력이기 때문에 마음처럼 잘 안된다. 깎아지른듯한 언덕길 앞에서 나는 스스로에게 한없이 인자해지고 마는 것이다.



반면에 트레드밀은 정신력이고 나발이고 뒤쳐지면 바로 벨트에 말려 뒤로 떨어진다고 생각하니 속도만큼은 유지된다. 장시간동안 일정 속도를 유지하는 것은 정말 중요한 스킬이고, 그 스킬을 구현하지 못하는 원인은 정신력인데 그걸 강제로 잡아주는 아주 큰 장점이 있었던 것이다! 




3. 안정적인 반복동작

또 하나 큰 차이점이라면 트레드밀에서 뛰는 것은 로드에 비해 많이 안전하다는 점이다. 돌부리에 걸릴 일도 없고, 갑자기 바닥에 물이 있어서 피해야 할 일도 없고, 자전거나 보행자가 갑자기 튀어나오는 등의 돌발상황이 없기 때문에 (거기에 더해서 2번에서 말한 강제 속도 유지도 있어서) 정말 안정적으로 반복 동작만 하면 된다. 이것이 아마도 트레드밀 러닝을 지루하게 만드는 가장 결정적인 요소가 아닐까 싶은데, 반대로 생각해 보면 자신의 달리기 습관을 고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라고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왼발과 오른발의 착지가 미묘하게 다른 짝발이라던가, 팔 치기를 이상하게 한다던가, 힘이 빠지면 어깨 힘으로 뛰려고 하는 이상한 습관 같은 것. 도로의 돌발상황이 없는 만큼 스스로의 달리기 자세에 온전히 집중하고 꾸준한 반복 동작을 통해 몸에 입력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운동선수들의 훈련 브이로그나 인스타그램을 보면서 동경하기도 하고, 동기부여도 많이 받는 편이다. 그런데 선수들도 종종 트레드밀을 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인터넷에 당장 마라톤이라고 검색만 해도 로드러닝에 심취하신 선배님들이 남겨놓은 트레드밀에 대한 흉흉한 말들을 쉽게 접할 수 있다. 물론 트레드밀만 1년 내내 뛰고 갑자기 로드에서 뛰는 마라톤을 뛰라고 하면 당연히 무리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트레드밀이 그렇게나 흉악한 물건이라면 선수들이 과연 시간과 체력을 낭비해 가면서까지 뛸까?



트레드밀은 이래서 안돼. 이런 점이 나빠. 트레드밀을 뛸 바에야 안 뛰고 만다.라는 사고방식을 버리고,

좋은 점은 좋은 점대로 받아들여가면서 적절히 훈련에 혼합해서 도입하면 효과적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 할 바에야 안 하는 게 나은"것은 없다. (범죄 제외)

모든 경험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나에게 남는다. 특히 운동은 더욱 그렇다. 오늘은 시간이 없어서 20분밖에 못 뛰겠다 싶은 날, "운동은 30분 이상 해야 효과가 있습니다"라는 말을 떠올리며 그럼 안 하는 게 낫겠다고 타협하지 말고 20분이라도 뛰는 게 무조건 나에게 도움이 된다.



달리기가 건강에 그렇게 좋다던데 한번 시작해볼까 싶다가도, 30분 이상 뛰어야지 건강효과가 있다던데? 하며 그냥 포기해버리지 말고, 1분이라도 뛰고, 걷기라도 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도움이 된다. 



"~~ 바에야"의 문법을 버리고

"~~ 라도"의 문법으로.



'트레드밀 뛸 바에야...'가 아닌

'트레드밀이라도'로 바꿔보는 것은 어떨지?

매거진의 이전글 브루클린 먹쟁이의 풍류 (멋쟁이 아님 주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