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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담 Jul 06. 2023

사람이기에 가능한 것

뉴욕마라톤까지 141일 퀸즈 10K

퀸즈


뉴욕시티 5보로 시리즈 중 하나인 퀸즈 10K.

NYC, 브루클린, 스태튼 아일랜드는 하프마라톤, 브롱스는 10마일(16km)인데 비해 거리가 가장 짧고 코스가 아기자기해 달리는 맛이 좋은 퀸즈 10K는 NYRR의 대회 중 가장 인기 있고 성대한 대회 중 하나다.



퀸즈는 한국인들이 많이 살고 있어서 뉴욕의 원조 코리아타운이라고 하는 '플러싱'이 있는 곳이라 한인들에게는 익숙한 곳이다. 아마 뉴욕에 살면서 고향의 맛을 찾아 플러싱에 안 가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퀸즈는 한국인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의 이민자들이 크게 타운을 형성하고 있는 곳이라서 문화적으로 다양한 곳이기도 하다. 퀸즈의 캐치프레이즈가 "The World's Borough"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물론 퀸즈가 월드 보로를 표방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과거 만국박람회를 열었던 코로나 파크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요즘같이 전 세계가 손바닥 안에서 연결되는 시절이 아니던 시절, 만국박람회는 그야말로 세계 규모의 축제였고 센세이션이었다. 바로 그 만국박람회가 열렸던 그 장소에서 퀸즈 10K 대회가 열린다.



코로나파크는 굉장히 큰 공원인데, 어째선지 코스는 이렇게 위쪽 반만 사용해서 굽이굽이 뛰는 구조로 되어있다. 옛날에는 아래쪽 호수까지 끼고 크게 도는 코스였지만 지금은 호수 쪽은 코스에 포함되지 않는다.

코스는 만국박람회가 끝나고도 철거하지 않고 남은 기념건물과 조형물 등 주요 포인트를 통과하도록 되어있기 때문에 자기 자기 한 재미가 있다.




죽도록 뛰어본 적이 있는가



나는 기본적으로 평생 운동을 안 했던 사람이다. 아주, 매우, 자랑스러운 얘기는 아니지만 어쨌든 사실이 그렇다. 하프마라톤을 3번 완주하고, 올해에 뉴욕시티 마라톤 풀코스도 뛸 예정이지만 지금도 실감이 잘 안 날 정도로 내 인생은 그저 앉아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삶이었다.



그래서 솔직한 심정으로는 5k든 10K든 그게 뭐든 완주했다는 자체로 많이 뿌듯하다. 심지어 꼴찌도 아니고 중간정도 성적으로 완주하면 나한텐 그게 엄청 큰 성과이고 자랑이다.



그래서 기록이 별로다...



NYRR의 대회를 나가면 뛸 때 가슴에 다는 번호표 앞에 알파벳이 붙어있는데 그게 얼마큼 빠른지를 나타내는 지표다. 나는 G인데 달리기 친구들이 꼭 한 마디씩 한다. "너는 E정도는 될 거 같은데 왜 G야?"

그거야 내가 동양인이라 실제 나이보다 젊어 보이고, 체격이 우량하니 그런 느낌이 들 수도 있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E라니 너무 언감생심이다.라고 말하면 또 꼭 한 마디씩 한다.



"너는 평소에 뛰는 거랑 대회랑 큰 차이가 없네"



띠용.

그랬다. 나는 평소에 뛰는 것처럼 대회를 나가서도 뛴다. 목마르면 멈춰 서서 물도 마시고, 목이 안 말라도 힘들면 멈춰서 또 마시고, 언덕이 나오면 느려지고, 아는 사람이 지나가면 인사도 하고, 일단 무엇보다 힘들면 바로 걷는다 ;;

그래서 평소에 나랑 같이 주말 장거리런을 하는 친구들이 대회에선 엄청난 추진력을 발휘해 E, F 넘버를 받는 사이에도 나는 G넘버에 멈춰서 있는 것이다.




달리기 변태의 최고 희열은 두 가지야.

안될 것 같은 거리를 완주하는 것이 그중 첫 번째, 그래서 우린 마라톤을 뛰지.

두 번째는,  이걸 뛰고 나서 내가 죽을 수도 있겠다 싶을 만큼 온 힘을 다해서 뛰는 것.

그리고 사실 안 죽어.




그래서 결심했다! 나도 한번 해보기로.







4월에 브루클린 하프를 앞두고 발목이며 무릎이며 시름시름 아프던 것이 여전히 깔끔 치 않아서 잘 때 발목에 감는 압박붕대부터, 꼼꼼한 스트레칭, 테이핑 등등 신경을 썼다.

다이어트 정체기 탈출을 겸해 스피드 트레이닝도 열심히 했다. 여러 가지 노력의 결과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살이 빠지고 몸이 가벼워진 만큼 기본적인 속도가 조금 빨라지기도 했다. 거기에 스피드 트레이닝으로 기름까지 부었으나, 마지막으로 꼭 필요한 것이 하나 빠져있었다.




사람이기에 가능한 것
지친 나를 밀고 끌어주는 힘



처음 큰 대회를 뛰거나(생애 첫 마라톤), 기록 경신에 도전할 때, 속도를 맞춰 같이 뛰어주는 사람이 있다. 흔히 "페이서"라고 부른다. 페이서는 큰 대회를 가면 주최 측에서 속도별로 배정을 해주기도 한다. 속도(또는 완주시간) 팻말을 들고 러너들과 함께 뛰어주는데 외외로 굉장히 도움이 된다.



나는 평소에 '요즘은 다들 GPS 시계를 차고 뛰는데 페이서가 왜 필요해?'라는 의문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는데, 코닝 하프마라톤 때 생전 처음 뛰어보는 시골길 코스에 질려서 그냥 그만 뛸까 싶었던 순간에 록키 주제가를 부르며 지나가는 페이서 뒤를 얼떨결에 따라갔다가 그 진가를 알게 되었다.



공식 페이서를 따라서 그룹런처럼 여러 명이 따라서 뛰기도 하지만, 우리처럼 클럽을 형성하고 있으면 친구들끼리 해주는 것도 흔하다. 특히 뉴욕시티 마라톤은 코스가 험해서 정신적으로도 많이 힘들기 때문에 경험이 많은 친구가 같이 뛰어주는 경우가 많다.

페이서 한 명에 여럿이 따라 뛰는 공식페이서와 다르게 페이서 한 명에 러너 한 명으로 맞춤 케어까지 해주는 것은 엄청난 프리미엄이고, 그래서 더 크게 느껴지는 안심감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페이서'를 친구에게 부탁하기는 또 웬만해선 쉽지가 않은 게,

"지난번에 내가 해줬으니 다음엔 내가 너 페이서 해줄게" 하는 식으로 품앗이가 되는 것도 아니고 (애초에 페이서는 나보다 훨씬 빠른 친구만 해줄 수 있는 거니까)

10K 정도면 그래도 몰라도, 뉴욕시티 마라톤은 참가비가 거의 300달러인데, 그 친구는 자기 돈도 쓰고 자기의 좋은 기록이 나올 수 있는 기회도 버리고 나한테 맞춰 뛰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의 바른 동양인답게 여러 친구들의 페이서 제의가 있었음에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던 어느 날.



"내가 퀸즈 7번 뛰었는데, 내가 뭘 더 바라겠어? 한번 보람이라도 느껴보자" 하는 친구가 있어서

그래, 이거 해보고 기록 잘 나오면 또 내가 브런치에 한번 글 털을 건수도 생기니 한 번은 해보자! 싶어 받아들였다.




그래서 나는 생애 처음으로, 몹시도 럭셔리하게도 "개인 페이서"를 대동하고 퀸즈에 입성했다.




목표는 55분대 피니쉬



퀸즈 10K는 큰 대회라서 출발 1그룹과 2그룹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또!!! 2그룹 선두였다. 그 경계선이 바로 G넘버인데, 나는 이게 매번 묘한 기분이다. 맨 뒤에서 출발하더라도 1그룹에서 출발해보고 싶은 마음과, 2그룹 선두 그룹에서 출발하는 것의 뿌듯함이 미묘하게 뒤섞여있는 기분....

하지만 이번에 기록 경신에 성공하면 분명히! 확실히! 1그룹으로 간다.




출발 후 2~3km 지점까지는 붐비는 코스에서 내 페이스를 지키는 것이 관건이다. 남의 팔 치기에 얻어맞는 것은 기본이고, 여차했다간 다른 사람과 발이 엉킬정도로 붐빈다. 그 와중에서도 살뜰한 성격의 내 개인 페이서는 귀신같이 나를 찾아내고 길을 터주기까지 하는 등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었다.

급수대를 지날 때는 물을 마시라고 권해주기도했지만, 날씨가 시원했기 때문에 물은 아예 마시지 않기로 했다. 사실 나는 아무리 더운 날도 10마일 정도는 아예 물을 마시지 않고도 뛰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없고 손에 뭘 들고 다니는 걸 싫어해서 그런 습관이 생겼다)



코스를 뛰면서 계속해서 다른 주자들을 제치면서 앞으로 나갔다.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기분이다. 나와 같이 출발하는 G넘버 러너들은 기본적으로 나와 같은 속도의 주자들이기 때문에 누구를 제치는 일도, 제쳐지는 일도 잘 없기 때문이다. 순조롭게 5km 기록판을 밟고 시계를 보니 어라? 약간 여유로운데??

이 정도면 너무 힘들 때 조금 걸어도 55분대에 완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퀸즈를 7번 완주한 내 개인 페이서가 코스를 잘 알고 있는 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 예를 들면 "저 앞에서 코너를 돌면 급경사 언덕이 나오는데 구간이 길지 않으니 속도를 늦추지 말고 그냥 가자" 하는 등의 정보를 주는 거였다. 나도 퀸즈를 작년에 한번 뛰어봐서 대충 느낌은 알지만, "짧은 업힐이 있다"라고 아는 것과 "속도를 줄이지 않아도 너는 통과할 수 있다"라고 말해주는 것은 정말 큰 차이였다.




호흡을 봐주는 것도 많이 도움이 되었는데, 이건 확실히 개인페이서이기 때문에 가능한 부분이었던 것 같다. 페이서 한 명에 러너가 여러 명이었다면 조금 어려운 부분이 아니었을까 싶다. 간간히 컨디션이 어떠냐고 물으면 "괜찮다" 정도로 짧게만 대답했다. 하지만 나는 4마일을 지나면 불이 꺼지는 성냥개비이기 때문에, 아니나 다를까 4마일 사인을 본 후로(약 6.5km 지점) 급격히 호흡이 짧아졌다. 그럴 때 의식적으로 숨을 참으라고 시키거나, 큰소리로 호흡주기를 맞춰주는 등 놀라운 능력으로 약 9km 지점까지 나를 일정한 속도로 끌고 가는 데 성공했다.




문제는 퀸즈 코스의 가장 악랄한 구간인데 마지막 약 600미터 정도를 남겨두고 눈앞에 피니쉬라인이 보이는데 오른쪽으로 멀리 ㄷ자로 갔다가 와야 하는 구간이 있다.

바로 여기가 멘털이 무너지는 포인트다. 작년에도 내가 이 구간에서 걸었던 기억이 난다. 지쳐서 울며 걷던 사람도 피니쉬라인이 보이면 뛴다는 말이 있건만, 이렇게 ㄷ자로 도는 건 이건 진짜 아니잖아!!!




심리적인 부분도 컸는데, 평소 km당 6분 이하의 페이스로 뛰는 일이 거의 없는 내가 이미 9km 이상을 5:30 정도의 페이스로 뛰었다는 사실에 심리적 부담감이 컸다. 이대로 더 뛰었다간 피니쉬라인에 들어가지 못하고 코스에 나자빠질 것 같았다. 하프마라톤도 아니고 10K 대회 나와서 코스에서 실려나가기는 싫었다. 이제 거의 숨이 턱끝에 차서 말을 할 상황도 아니었지만 쥐어짜 내 말했다.

"나 이제 못할 거 같아. 5분대 페이스로 9km까지 뛰었으니까 이제 됐어."





시계 보지 말고 끝까지 뛰어
55분에 들어갈 거야!



꾸역꾸역 달려 ㄷ자 구간을 두 번 꺾고, 이제 정말 정면으로 피니쉬라인을 향해 뛰기만 하면 되는 구간. 거기부터는 피니쉬라인에 달린 시계가 보인다. 하지만 시계는 첫 주자가 출발한 시간 기준으로 나오기 때문에, G그룹에서 출발한 내 기록 시간이 아니다. 지금 55분 넘었을까? 지금부터 남은 거리를 스퍼트 하면 목표기록 안에 들어갈 수 있을까? 내 시계를 보고 싶다.



그런데 나도 알고 있다. 내 시계를 보는 순간, 시간에 여유가 있다면 아마 나는 안심감에 느려질 것이고, 이미 55분을 한참 지났다면 이제 뭘 해도 소용없다는 생각에 멈춰버릴 것임을.




10K는 6.2마일이다. 대회의 거리 사인은 마일 단위로 되어있고, 중간지점인 5K 지점에 Km 사인이 하나 있는 정도다.

6마일 사인을 지난 후로 그냥 진짜로 죽을 것만 같다. 내가 지금껏 장거리 달리기를 3년이나 했는데, 하프마라톤을 3번이나 뛰었는데... 이런 느낌은 처음이다.

그 와중에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는게 이런 것인가 싶게 여러 가지 생각이 지나간다.



안될 것 같은 거리를 완주하는 것이 그중 첫 번째, 그래서 우린 마라톤을 뛰지.

두 번째는,  이걸 뛰고 나서 내가 죽을 수도 있겠다 싶을 만큼 온 힘을 다해서 뛰는 것.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닌데, 내가 이번에 55분을 달성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닌데... 왜 이런 걸 한다고 했을까? 애먼 친구한테 화를 낸다.

"너 죽일 거야!!"



주변에서 뛰던 모든 러너들이 빵 터져서 웃었다.




"I know you can and you will"



시계 보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는 친구가 옆에서 약간 속도를 올리는 게 느껴졌다. 그래, 만사 모르겠다. 네 말이 맞다. 나는 할 수 있고, 할 것이다.


만국 박람회 느낌으로 여러 나라의 국기가 양옆으로 나부끼는 피니쉬 구간으로 들어가 골인. 시계 정지.




55분 19초





두 번째는,  이걸 뛰고 나서 내가 죽을 수도 있겠다 싶을 만큼 온 힘을 다해서 뛰는 것.

그리고 사실 안 죽어.




정말 그랬다. 달리기 끝나면 늘 주는 물이랑 간식이 든 봉투를 받아 들고 잠시 바닥에 나자빠질 뻔했지만, 그리고 끝나고 나서 20분 동안 울었지만, 죽지는 않았다. 그리고 뭐라고 설명할 수조차 없을 만큼 개운한 기분이 들었다.

뭐랄까... 달리기를 처음 해본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현재 나의 NYRR 프로필 페이지

베스트 페이스 8:54 (마일)

F넘버 커트라인이다.




요즘 시계가 참 좋다. 달리기 한번 하고 나면 그날의 운동량을 분석해 최소 휴식시간을 알려주는 것은 물론, 내 신체 능력상 불가능한 수준으로 계속해서 무리해서 달리면 하지 말라고 말해주기까지 한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약해져 멈출 때 다시 뛰게 해주지는 못한다. 그것이 바로 사람이기에 가능한, 사람에게만 가능한. 그런 달리기가 아닐까 싶다.





최대심박수 194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나는 39세다.

보통 최대심박수는 220-자기 나이.



비록 죽을 뻔(?) 했지만, 26세로 돌아갔던 퀸즈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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