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핀
일단 달리기라는걸 시작한다! 하면 포니테일이다.
머리를 한데로 싹싹 긁어모아 고무줄로 질끈 묶는 그 행위에 왠지모를 투지가 솟아오른다고 할까.
기합을 넣는것과 마찬가지다.
처음 몇년은 포니테일을 하고 뛰었다.
문제는 이 포니테일이 내 등을 철썩철썩 친다는 점이다.
한 20분 치면 모르겠는데, 그게 2시간이 넘고 그러다보니 보통 짜증나는게 아니다.
그래서 포니테일의 꼬리를 돌돌 말아 올리는 소위 “똥머리”를 해봤다.
그랬더니 이건 뭐 무거워서 흘러내리고, 점점 풀리고, 도중에 에라이 차라리 포니테일이 낫다 하며 고쳐묶기를 반복…
그러다가 이제는 단발로 댕강.
잘라보기도 했다.
달리기 때문에 20년을 고수해온 긴머리를 잘라버린 여자 바로 나야 나….;;;
그랬더니 이건 또 충분히 예상 가능하게도,
머리가 묶이지도 않고 애매하니 더 환장하겠다.
긴 생머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뛰는 사람들도 있길래, 그럼 나도 단발머리를 살랑이며 뛰어봐야지 했더니만…
잊고있었다. 머리에서 땀이 나는 체질이라는걸…
나는 그냥 스네이프 교수님이 되어버린다는걸….
그래서 모자로 머리를 누르고 뛰어보기도 했다.
물론 나 한 장비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좋다는 유명한 러닝 전용 모자도 꽤 써본 사람이다. 문제는 나한테 안 어울리고 어쩌고를 떠나 너무 덥다. 아무리 소재가 좋아 통기성이 어쩌고 해도 일단 한꺼풀 더 덮었다는 시점에서 너무 덥다 ㅠㅠ
그래서 그 단발머리를 다시 길렀다.
포니테일을 거쳐,
그 포니테일이 다시 등짝에 철썩거릴때 쯤.
딸램의 발레학원에서 보내온 올림머리 지침을 읽다가 갑자기 깨달아버린것이다!
점프와 턴에도 흐트러지지 않는 발레 머리! 그렇다면 마라톤을 완주해도 흐트러지지 않을 터!!!
그래서 나는 머리를 동그랗게 똘똘 말아서 U핀으로 고정시키는 “발레리나 머리”를 하고 뛴다.
U핀이 생긴게 저렇게 허술해서 이게 어디 머리를 잡아주기나 하겠어 싶은데 의외로 요령만 잘 터득하면 확실하게 고정이 된다.
뛰면서 땀을 흘려 머리가 젖으면 더더욱 강력하게 고정된다는것도 장점이다. 머리가 한번 젖으면 오히려 풀고싶어도 핀을 뽑는게 더 힘들정도다.
포인트는 “예쁘게 볼륨을 주어 풍성하게” 또는 “내추럴한 부스스한 느낌”을 주면 도중에 풀리기 때문에,
아주그냥 인정사정없이 싹싹 긁어모아서, 똘똘 뭉쳐서, 못생김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용기가 필수다.
어차피 뛰다가 힘들어지면 못생김이 흘러넘치기 마련이니까
조금 일찍 드러냈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는다고 믿으면서…
도중에 한번 단발머리 맛을 봤더니
그 간편한 샴푸, 그 빠른 드라이!!!
다시 자르고 싶은 마음도 굴뚝같지만,
적어도 11월 뉴욕마라톤 까지는 U핀이 꽂아지는 길이로 유지해야겠다는
누가 들으면 “선수세요?” 할만큼
모든게 뉴욕마라톤에 맞춰져있는 사람.
나야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