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그로라는 늪 #5
지루하고 공감가지 않는 내용이라고 해서, 나쁜 콘텐츠라는 법은 없다. 만듦새의 지루함이 아니라면, 보통은 받아들이기 낯선 내용을 사람들은 지루하다고 인식한다. 낯선 내용에는 사회적 소수자의 관점, 용기 있는 비판, 사태를 바라보는 복잡다단한 맥락, 보다 다양하고 폭넓은 의견 등이 포함된다. 영화 ‘캐롤’의 토드 헤인즈 감독은 허프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지배적 문화에 속하지 않는 이야기를 가져오려면 감정적 번역이 필요하다. (...) ‘관습적이고 예측 가능한 반응이 있으면 이 캐릭터들에게 공감하겠어. 하지만 그런 게 없으면 그건 문제가 있는 거야.’ 라는 식이다. 지배적 사회의 기분을 좋게 하기 위해 우리가 맞춰줘야 하는 것이다.” 다수의 지루함 속에 소수의 낯선 의견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다. 사람들은 공감하지 않는 콘텐츠를 받아들이는 일을 점점 더 힘겨워한다. 그리고 소비자의 행태에 발맞춰 직관적이고 공감 가는 콘텐츠를 내놓는 공급자들은, 지루함을 악마화하는 메커니즘에 기여하고 있다.
영상을 대중에 선보이기 전, 이 콘텐츠가 잘 될지 판단하기 위해 생긴 버릇이 있다. 이 영상을 처음 보는 사람이 언제쯤 눈을 떨구고 지루해하는지를 보면, 대박인지 쪽박인지 파악할 수 있다. 다른 그 어떤 콘텐츠보다도 SNS 플랫폼에 게재하는 영상들은 조금이라도 지루한 순간 바로 소비자의 외면을 받고 알고리즘에서도 탈락된다. 페이스북은 영상 재생 후 초반 3초를 넘겨야 조회수 1로 집계가 된다. 유튜브는 클릭하는 순간 조회수 1이 되지만, 시청시간과 평균 조회율이라는 지표를 따로 두어 영상을 얼마나 오래 봤는지, 띄엄띄엄 넘겨보거나 중도 이탈하지 않았는지를 꼼꼼하게 체크한다. 그렇기 때문에 영상의 소재 뿐 아니라 구성과 편집에 이르기까지, 지루함은 콘텐츠의 품질을 평가하는 중요 기준이 된다.
지루함의 사전적 반대말은 신선함, 재미 등이겠지만, 콘텐츠를 가리킬 때에는 직관성, 공감성이 가장 정확하다. 보통 영상이 지루하다고 할 때에는, 2가지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1) 영상 자체의 퀄리티와 완성도가 낮고, 구성이 엉성한 경우도 있지만, (2) 영상의 소재와 내용이 낯설고 어려울 때도 있다. 꼭 전문적인 내용이 아니더라도 영상에서 다루려는 사안이 복잡다단하고 이해관계가 얽혀있거나, 명쾌하게 결론이 나지 않는 열린 결말일 때 사람들은 낯설거나 이해가 어렵다고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2)의 지루함인 경우 반대 콘텐츠는 직관적이어서 이해하기 쉽고, 공감이 가는 특성을 지닌다. (1)과 (2)의 지루함을 배척하는 과정에서 지루함이 악마화되며, 공감과 직관성은 숭배된다.
20년 9월 사피엔스 스튜디오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 이 채널의 인지도를 대중에 널리 알리게 된 콘텐츠는 <역사읽어드립니다> 시리즈였다. 21년 12월 현재 시즌4에 이르기까지 15개월 간 약 70여 건의 에피소드를 발행한 역사읽어드립니다 콘텐츠 중에서, 시즌1 2화가 누적 조회수 430만, 누적 노출수 7500만으로 압도적 1등을 달리고 있다. 유튜브 광고를 1원도 태우지 않고 자연 발생으로 조회수를 만들어낸 이 영상의 주제는 ‘아버지의 후궁을 젓갈로 담글 정도로 포악했던 연산군’이다. 이 영상은 <역사읽어드립니다> 시리즈 뿐 아니라, 사피엔스 스튜디오 채널 전체에서도 2위를 약 조회수 약 150만 정도의 격차로 따돌리고 영예의 1등을 유지하고 있다. 2화가 떡상하여 채널 인지도를 드높인 이후, 전체 영상 톤이 결정되었다. 최대한 자극적이고 직관적인 소재를 찾아라. 조선시대 고문법과 형벌, 일제가 자행한 생체실험, 이순신이 적장의 사지를 꼬챙이 꽂은 내용 등이 연이어 제작되었고 모두 조회수 100~200만대를 기록했다.
이런 상황에서 역사읽어드립니다 시리즈의 다음 아이템을 정하기는 명확해진다. 조선 태종 시절 신문고의 실효성에 대한 비판의 소재와, 광해군이 형제를 죽일 정도의 잔학한 폭군이 된 이유에 대한 소재가 있다면 콘텐츠 공급자는 무엇을 골라야 할까? 지루함은 악마화 되기 때문에, 공급자들은 영상 소재부터 직관적이고 이해가 가능한지 검토하고, 낯설고 어려운 내용은 거르게 된다. 사피엔스가 아니더라도 마찬가지다. 처음 본 사람이 즉시 이해할 수 있는지, 영상을 만들면 3초안에 어떤 컨셉인지 명확하게 파악 가능한지가 영상 구성과 편집의 중요 기준이 된다. 그 과정에서 공급자들은 어떤 소재가 더 대중에 전달할 가치가 있는지, 혹은 사회적으로 논의될 부분이 있는지에 대한 고려를 생략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 따라 지루함이 배제된 영상 위주로 공급이 되다보면, 소비자는 또다시 공감이 가고 직관적인 콘텐츠만 클릭하여 영상을 시청하면서 이 악순환은 공고화 된다.
* 조선 태종 시절 신문고의 실효성에 대한 비판 내용 (1만)
* 광해군이 형제를 죽일 정도의 잔학한 폭군이 된 이유 (89만)
영상의 주제 뿐 아니라, 포장지에 해당하는 썸네일 이미지와 제목에서도 지루함은 악마화된다. 방송클립을 연 2~3만 건 제작하다보면, 좋은 썸네일과 나쁜 썸네일은 바로 구별해낼 수 있다. 해당 방송분을 보지 않았어도 썸네일(과 제목)만으로 어떤 내용이 있었는지 바로 이해 가고 공감 된다면 좋은 썸네일이고, 이미지와 워딩의 배열이 서로 다른 내용이거나 궁금하지 않다면 나쁜 썸네일이다. 같은 방송 구간을 사용하여 클립을 제작하더라도, 영상의 썸네일과 제목이 어떻게 연출되었는지에 따라 조회수는 4~50배까지 차이나기도 한다. 알고리즘은 포장지가 사람들에게 노출되는 순간부터 작동하기 때문에, 썸네일 클릭율이 조회수를 좌우하고, 나아가 영상을 여기저기 노출하는 빈도를 결정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공급자는 영상에서 직관성이나 공감을 취할 수 없다면, 포장지만이라도 직관성과 공감을 추구하게 된다. 사피엔스 스튜디오는 주로 <역사읽어드립니다> 시리즈나 <심리읽어드립니다> 등이 유명하지만, 초창기에는 <다윈읽어드립니다> 시리즈도 있었다. 국내 진화 생물학의 권위자 최재천 교수를 초빙하여 진화 생물학의 개념 뿐 아니라 다윈이 종의 기원을 집필하기까지의 흥미로운 일화를 다루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용이 어려웠다. 그러던 중 종족 보존 본능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에피소드가 나왔고, 바로 썸네일에서 ‘짝짓기는 없다’, 제목에서 ‘동물 번식의 숨겨진 비밀’ 등으로 포장지가 씌워졌다. 결론적으로 이 영상은 시리즈 전체의 평균 조회수 4만회를 훨씬 웃도는 60만을 기록하고 있다.
1시간 짜리 풀버전 영상에서 60분 내내 짝짓기와 번식의 비밀만 설명하기란 무척 고역일 것이다. 그러나 영상과 알고리즘이 첫 대면을 하는 썸네일이라는 포장지를 만들 때, 공급자들은 영상의 주제를 비약하거나 축약하여 가장 직관적이고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내용과 이미지를 고르게 된다. 클립 사업을 3년째 하면서 썸네일에 관해 항상 입에 달고 사는 말이 있다. “내용을 모르는 사람이 봐도 이해가 가고 재밌는가? 궁금하고 공감이 가는가? 클릭을 부르는가?” 초를 다투는 클릭의 승부에서 이기기 위해, 썸네일의 이미지와 워딩은 오로지 직관성과 공감의 대원칙을 향해 점차 가다듬어지고 연출된다. 조금이라도 직관적이지 않는 곁가지의 맥락들은 제거하고, 개개인의 피드에 노출되는 수많은 영상을 제치고 단박에 선택받을 수 있도록 지루함을 덜어내는 작업이 계속된다. 속된 말로는 어그로를 끈다고 한다.
콘텐츠 공급자의 플랫폼 중독 고찰
#1 콘텐츠를 플랫폼에 올리는 일을 하는가? https://brunch.co.kr/@mrtolstol/7
#2 제작자도 플랫폼에 중독된다 https://brunch.co.kr/@mrtolstol/24
#3 알고리즘은 절대 중립적이지 않다 https://brunch.co.kr/@mrtolstol/26
#4 호모 플래포무스는 댓글로 생각한다 https://brunch.co.kr/@mrtolstol/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