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 김승옥, 『무진기행』
내가 깨어있을 때에는 수없이 많은 시간의 대열이 멍하니 서 있는 나를 비웃으며 흘러가고 있었고, 내가 잠들어 있을 때는, 긴긴 악몽들이 거꾸러져 있는 나에게 혹독한 채찍질을 하였었다.
난 종종 무엇 하나 제대로 이룬 것 없는 내 삶을 보며 실의에 빠지고만다. 그 이면에는 현실의 나보다 고귀하고 강렬한 존재가 되고 싶은 열망이 있다.
정의롭고 따뜻한 사람이고 싶지만 무리에서 버림받고 싶지 않아서 불의를 못 본 척 하거나 미움당하는 누군가를 외면했던 모습. 사랑받지 못할까봐 ‘거절’을 하지 못해 많은 짐을 끌어안고 살아야 했던, 친구들을 잘 사귀지 못했던, 외로운 마음을 이성관계로 풀고자 했던 과거 학창시절의 모습들을 스스로 찌질하게 여기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원하던 모습과는 달리 활동가라는 이름을 갖고도 내부의 불의에 제대로 저항하지 못한 채 도망쳐버린 나에 대한 실패감이 여전히 나를 짓누른다. 난 그 실패감, 수치심을 정면으로 바라볼 용기가 여전히 없나보다. ‘무진의 안개’속으로 들어갈 자신이 없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가 뿜어 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안개에 의해 보이지 않는 먼 곳, 무의식으로 유배당해 버린 미해결된 과제들. 저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듯, 발가벗은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만 같다. 무진기행의 주인공처럼, 쓰고 나서 찢어버릴 마음이라도 저 안개 속에서 내 삐걱거리고 불량한 삶이 그 삶 그대로 잠시, 존재하고 싶다.
출판을 중단시켜버렸다. 안이한 태도로 써낸 이 소설 한 편이 그 동안 다작을 스스로 경계하면서까지 소설이 천박한 한 토막 이야기여서는 안 된다고 고집하던 나의 신념을 송두리째 훼손시켜버리는 듯하여 그 역겨움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작가가 소설 「강변부인」의 출판을 중단시켜버린 에피소드가 마음에 남는다. 그가 글을 대하는 태도를 보며 내 글쓰기의 가벼움이 부끄러워지다가도, 이 가벼운 글쓰기라도 다작(多作)을 멈추지 않아야 함을 느낀다. 그 노동이 작가가 고집하던 글에 대한 신념에 나를 데려다 줄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