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석만한 햇빛

[독서노트] 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by 문슬아



© gerardom, 출처 Pixabay


20200601


『야생초 편지』를 읽은지 얼마 안되어 다시 감옥에서 쓴 이야기를 읽으려니 첫 책장을 넘기는 데 시간이 걸렸다. ‘옥살이’라는 처한 환경은 비슷하나 글의 결이 참 다르다. 황대권 선생의 글은 가장 밑바닥의 존재로 척박한 땅을 일구는 야생의 느낌이라면, 신영복 선생의 글은 작은 창으로 들어온 ‘방석만한 햇볕’ 한 조각에 고요히, 치열하게 자신의 영혼을 비추어 보는 것 같다. 저 옛날 고립된 섬에서 묵시록을 쓰던 요한이 떠오른다.


산문들과 편지글 중에서 난 특히 「청구회 추억」이 참 좋았다. 신영복 선생이 아이들을 대하는 모습이 그의 성품을 온전히 보여준다. 아이들에게 첫 질문을 어떻게 던질까 고심하는 선생과 달리 나라면 대뜸 이름부터 묻거나 “너 몇 살이니?” 고민 없이 툭 질문을 던졌을 것 같다. 무례함인 줄도 모른채 사람을 대하는 모습들이 내게도 참 많다. 특히 아이들에게. 스물 넷의 나는 어떠한 삶을 살았나, 부끄러운 마음도 든다.


그동안 여기저기서 빵빵 터지는 개인사들을 마주하고 처리하느라 몸과 맘이 많이 지쳤었다. 스트레스가 쌓이니 책은 손에 안잡히고, 겨우겨우 주어지는 짬에는 SNS만 열심히 살피는 게 전부였던 며칠이었다. 헛헛한 마음은 자꾸 무언가를 소비하는 데에만 관심을 돌리게 하고,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원망들만 차올랐다. 마음이 황폐해져만 가는 시간들이었는데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 침침한 내 맘에 ‘방석만한 햇볕’이 되어주었다.


반짝이는 구절


- 사랑은 선택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사후에 서서히 경작되는 것이다. (22)

- 고립되어 있는 사람에게 생활이 있을 수 없다. (23)

- 불행은 대개 행복보다 오래 계속된다는 점에서 고통스러울 뿐이다. 행복도 불행만큼 오래 계속된다면 그것 역시 고통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24)

- 세상이란 관조의 대상이 아니라 실천의 대상이다. (24)

- 혼자라는 느낌, 격리감이나 소회감이란 유대감의 상실이며, 유대감과 유대의식이 없다는 것은 ‘유대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27)

- 사회란 ‘모두살이’라 하듯이, 함께 더불어 사는 집단이다. (27)

- 그러므로 나는 반드시 대답을 필요로 하는 질문을, 그리고 어린이들이 가장 예민하게 알아차리는 놀림의 느낌이 전혀 없는 질문을 궁리하여 말을 걸어야 하는 것이다. (31)

- 또는 잠에서 막 깨어 그것이 꿈이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이런 때에는 어김 없이 현실의 땅바닥에 떨어져버린 한 마리씩의 깃이 젖은 새처럼 풀죽은 꼴이 됩니다. (57)

- 그 개인이 이룩해놓은 객관적 ‘달성’보다는 주관적으로 노력하고 있는 ‘지향’을 더 높이 사야 할 것이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너도 알고 있듯이 인간이란 부단이 성장하는 책임귀속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66)

- 저는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결코 많은 책을 읽으려 하지 않습니다. 일체의 실천이 배제된 조건하에서는 책을 읽는 시간보다 차라리 책을 덮고 읽은 바를 되새기듯 생각하는 시간을 더 많이 가질 필요가 있다 싶습니다. 지식을 넓히기보다 생각을 높이려 함은 사침(思沈)하여야 사무사(思無邪)할 수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85)

- 나는 계수님의 편지를 읽고 문득 계수님께서는 ‘일’을 갖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가정에서도 물론 가사라는 이름의 상당한 일거리가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대부분이 미화된 소비행위일 뿐, 능력과 가치를 창조하는 생산 그 자체와는 구별되는 것이라 믿습니다. (95)

- 3월이라지만, 겨울은 아직도 어느 응달녘에 숨어 있다가 되돌아와 한 차례 해코지를 한 다음 못내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물러갈 것입니다. 작년이던가, 개나리가 피다가 얼어버린 측은한 기억이 있습니다. 꽃이 얼다니. 저희는 예년과 같이 아직도 겨울 내의를 벗지 않고 있습니다. (99)

- 그저 우직하게 외곬으로 읽어나가는 것만 못한 줄 알고 있으면서도, 무슨 편법이나 첩경이 없나 자주 살피게 됩니다. 이것은 관심의 낭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103)

- 우리는 타인에게서 자기와 많은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남는 차이를 이해하게 됩니다. 이 ‘차이’에 대한 이해 없이 타인에 대한 이해가 충분한 것이 될 수는 없으며, 그 사람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없이 그의 경험을 자기 것으로 소화할 수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115)

- 이곳의 우리들에게는 여름과 겨울, 덥다와 춥다의 극지가 존재할 따름입니다. 가을은 ‘제 5의 계절’, 다만 추위를 예고하는 길 바쁜 전령일 뿐 더불어 향유할 시간이 없습니다. (117)

- 닫혀 있던 일상의 울타리가 열리며, 부산한 준비와 장만, 어른들의 상의 그리고 술렁이는 소문, 그리하여 답습과 안일의 때묻은 자리에 급속히 충만되는 ‘새로움’과 ‘활기’. 이것은 어른이 되어 굳어진 모든 가슴에까지 메아리 긴 감동으로 남는 것입니다. (131)

- “당신의 모든 힘과 능력과 정성을 기울여, 당신의 자녀들을 위하여 땅을 보존하고 또 신이 우리를 사랑하듯 그 땅을 사랑해주십시오. …… 백인들일지라도 공동의 운명으로부터 제외될 수는 없습니다.” (133)

- “땅에 넘어진 사람은 허공을 붙들고 일어날 수는 없고 어차피 땅을 짚고 일어설 수밖에 없듯” (135)

- 지식은 책 속이나 서가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리된 경험과 실천 속에, 그것과의 통일 속에 존재하는 것이라 믿습니다. (140)

- (서도) 좋은 글씨를 남기기 위하여 결국 좋은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는 평범한 상식이 마음 흐뭇합니다. (147)

동향인 우리 방에는 아침에 방석만한 햇볕 두 개가 들어옵니다. 저는 가끔 햇볕 속에 눈감고 속눈썹에 무수한 무지개를 만들어봄으로써 화창한 5월의 한 조각을 가집니다. (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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