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 사사키 아타루,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사랑에 흠뻑 빠진 이가 쓴 편지 같다. 자신의 사랑을 반대하는 누군가에게 자신이 사랑에 빠진 그 대상이 얼마나 아름답고, 자신의 삶을 파고든 혁명이었는지를 간절한 마음으로 고하는 것만 같았다. 사랑에 취해 쓰다보니 가끔은 이 말이 저 말 같기도 하고, 우왕좌왕 하기도 해 결국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잘 모르겠어서, 몇 번이고 문장을 되짚어야 할 때가 많았다. 그래서일까. 혹자는 이 책을 ‘잘 안 읽힌다’, ‘혁명을 과하게 엮느라 온갖 사상을 끌어다 썼다’ 등 혹평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호평이 훨씬 많은 것 같다)
어찌되었든 루미의 글 다음으로 내게는 좀 어려운 읽기였다. 말하듯이 다가오는 구어체 문장 안의 저자의 호흡과 감정의 변화들도 느껴지는데, 이러한 비언어적인(?) 서브텍스트를 이해하는 노력을 더하면, 이 글을 조금 더 소화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도 든다. 난 이번에는 그걸 잘 못한 것 같고. 문체에서 온 것도 있겠지만 니체, 라캉의 철학 등 배경지식이 부족한 탓도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 책에 자꾸 끌린다. 그래서 다행이다. 한 번 더 읽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문학 같은 건 함정투성이여서 멍청하게 이해하면 큰일인 작품이 많다, 고 말이지요
니체의 '신은 죽었다'를 교회에서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보고 있으면 정말 문학은 함정투성이가 맞는 것 같다. 물론 나도 그것을 온전히 잘 이해한 것인지는 미지수다. 학창시절 시인 이상의 글에 밑줄을 긋고 분석을 하며 3점짜리 문항에 코를 박고 있을 때, 문득 이상이 이 광경을 알고는 관뚜껑을 열고 뛰쳐나와 아홉 번 째 아해와 함께 당신이 쓴 시를 모두 찢어버리고 다니지는 않을까 발칙한 상상을 했던 것이 떠오른다. 이해란 무엇인가.
루터의 대혁명 부분을 보면서, 한 사람의 책읽기가 가지고 있는 혁명의 잠재성이 얼마나 큰지를 실감한다. 나도 살면서 성경을 참 많이 (문자적으로) 읽어왔는데, 어렸을 때 교회에서 읽으라 해서 대각선으로 읽고, 어린이예배 때 말씀 구절을 외워야만 밥먹으로 보내주는 바람에 암송을 열심히 하기도 했지만 나에겐 늘 따분할 뿐, 살아서 내 속에 들어오는 문장들은 아니었다. 그런데 IVF 공동체에서 성경을 대면극, 그룹 스터디, PBS 등 다양한 방식으로 깊이 파고들면서 몸으로 읽는, 그리고 삶으로 읽는 적용이 내 인생을 바꿔놓기는 했다. 예수의 삶에서 배운 것들을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살아내려 애쓸 때, 그 때의 나의 선택이나 발걸음이 혁명과 닿아있다는 것도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다시 느낀다. 전태일 평전, 헨리 나우웬의 축어록, 프레이리의 페다고지가 내 삶에 남긴 흔적들까지.
무함마드의 이야기에서는 읽는 것에 대한 의미를 낯설게 바라보게 되었다. 글을 읽지 못하는 무함마드가 읽은 코란. 신과의 만남이 신비롭다.
다시 말해 이 ‘읽는 것’은 듣는 것도 눈으로 읽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양 쪽 다고, 그 어느 쪽도 아닌 ‘뭔가’입니다. 눈으로 소리를 읽고 귀로 문자를 듣습니다. 그 둘이 아직 분리되지 않은, 미분화된 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벌거벗은 형태의 ‘읽기’ 자체가 여기서 출현했습니다.
이 벌거벗은 형태의 ‘읽기’의 경험이 나에게는 있을까. 글을 알지 못하는 여성노인들의 읽기와 쓰기를 옆에서 지켜보고 독려하면서 느꼈던 감정들이 떠오른다. 삶의 경험을 살아있는 언어로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분들, 그 분들이 한 자 한자 어렵게 풀어낸 삶들을 만날 때마다 난 이 벌거벗은 형태의 읽기를 아주 조금이나마 경험할 수 있었던 건 아니었나, 감사함에 마음이 젖는다.
반짝이는 구절(글귀 모음)
“유일한 참된 충고자, 고독이 하는 말을 듣도록” (17)
사실 자신만이 깨달았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평범하고 꼴불견인 게 어디 있겠습니까? (19)
두루 살피는 것이 좋다는 것에 가치를 두지 않고, 알고 있다는 것에도 가치를 두지 않고, 정보를 차단합니다. 그러면 단적으로 무엇을 해야 좋을지 모르게 됩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릅니다. (27)
들뢰즈는 철학이란 개념의 창조라고 말했습니다. (32)
개념, 임신, 그것은 세계를 다시 낳는 것입니다. (33)
문학 같은 건 함정투성이여서 멍청하게 이해하면 큰일인 작품이 많다, 고 말이지요. (40)
“자신이나 자신의 작품을 지루하다고 느끼게 할 용기를 가지지 못한 사람은 예술가든 학자든 하여튼 일류는 아니다.” -니체 (43)
‘혼자 본 것은 사실 본 것이 아니다’(53)
최후의 심판, 세계의 종말에도 벌이나 보답을 필요로 하지 않는, 불멸의 영광도 필요로 하지 않는 즐거움이란 대체 무엇일까요? (56)
성서에는 교황이 높은 사람이라는 따위의 이야기는 쓰여 있지 않습니다. (83)
책은 읽을 수 없습니다. 읽을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책’으로 만들자마자 몇 번 읽어도 알 수 없게 됩니다. 그런 책만이 책입니다. (85)
중요한 것은 그가(루터) 여성에게도, 즉 소녀에게도 교육을 해야 한다고 분명히 말한, 아마 유럽 역사상 최초의 ‘문학자’였다는 사실입니다. ((97)
책을, 텍스트를 읽는 것은 광기의 도박을 하는 일입니다. (105)
책을 읽고 다시 읽는 것만으로 혁명은 가능하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당연히 운때라는 것도 있습니다. (105)
텍스트의 변혁이야말로 혁명의 본질입니다. (113)
과거의 혁명이 아무리 피로 물들었따고 하더라도 혁명의 본질은 폭력이나 주권 탈취가 아니라 텍스트를 다시 쓰는 것이라는 개념에 우리는 아직 도달하지 못한 것입니다. (113)
다시 말해 이 ‘읽는 것’은 듣는 것도 눈으로 읽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양 쪽 다고, 그 어느 쪽도 아닌 ‘뭔가’입니다. 눈으로 소리를 읽고 귀로 문자를 듣습니다. 그 둘이 아직 분리되지 않은, 미분화된 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벌거벗은 형태의 ‘읽기’ 자체가 여기서 출현했습니다. (148)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자음과모음,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