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유 Mar 04. 2024

원망과 무력을 딛고 약을 먹는다

약물복용 3년차 분기점에 서다


작년 2월에 김천을 떠나 여기 강원도 고성으로 이사왔다. 이사 전에 가까운 정신과부터 예약했어야 했는데 방심한 나머지 약이 떨어졌다. 강릉아산병원에 전화했는데 예약할 있는 가장 가까운 날이 뒤. 망했다고 생각했을 맘카페에서 평이 안좋은 동네 정신과 의원발견하고 굳이 찾아갔다. 악명높은 만큼 사람이 별로 없을 같았기 때문. 이전 병원에서 소견서대로 약만 그대로 처방받아오자는 심산이었다. 


동네 의원은 미리 각오하고 갔는데도 문화충격. 정신과 맞나? 생각이 들었는데, 진료실 들어갔더니 50인치 되는 모니터 뒤로 의사가 서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고, 의사도 굳이 내 얼굴은 보지 않았다. 초진이라서 이것저것 물어보긴 하는데 진짜 AI랑 대화하는 줄 알았다. 약간 매드 사이언티스트 같기도 하고. 그런데 생각보다 나쁘지가 않았다. 구구절절 처음부터 다시 내 증상을 설명할 필요도 못느꼈고(어차피 다른병원 갈거니까), 감정적 에너지를 쏟을 필요도 없고, 약도 별탈없이 잘 처방해줘서 다행이다 생각했다. 


한 달 뒤, 기대하는 마음으로 강릉까지 병원을 찾아갔는데 3차병원이라 예약을 했는데도 대기가 길었고 진료는 짧았다. 실망했다. 왕복 두시간 길에 버렸고, 진료비는 비싸고 그냥 약만 받는 곳이구나라는 생각에 회의감이 들었다. 자포자기 심정으로 그냥 '약 복용만 유지하자',  '나아질 생각은 말고 그냥 현상유지도 감사하다' 생각하며 다시 동네의원으로 옮겼다. 그리고 지금까지 착실하게 약만 받아온다. 너무 무기력할때면 의사가 권하는 비타민 주사도 맞고, 약이 안들 때는 다른 약도 추가해보기도 한다. 그럼 부작용을 겪고 병원에 전화를 하고 다시 약을 뺀다. 그냥 평소 먹던 약만 계속 먹기로 한다. 


이렇게 1년을 지내고 나니 현상유지는 커녕 악몽 횟수는 또 늘고, 계절성 우울까지 겹쳐 무기력은 심해지고 매일 술을 먹고(양보다는 횟수가 중독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그러면서 또 완벽주의는 씨게 발동해서 실패감과 스트레스는 커져가고 아이들과 있을 때는 다른 자아를 데려오느라 정말 정신이 분열될 지경에 이를 때도 있었다. 


정신차리고 보니, 무기력과 함께 뒷걸음질 아니 땅밑으로 곤두박질 치고 있는 내가 보였다. 김천에 있을 때부터 권유받았던 정신분석상담을 2년이 지나서 예약했다. 이번 주 목요일에 첫 상담이다. 강릉까지 가야한다. 체념하지 말고, 체념 밑에 가려진 원망감을 외면하지 말고 상담이 잘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악몽과 우울 삽화의 빈도를 잘 기록하면서 약물치료도 좀 더 적극적으로 의사와 소통하면서 진행해야겠다. 


오늘도 원망과 무력의 늪에서 나 자신을 멱살 끌고 나와 약을 먹는다. 



이전 10화 제자리 걸음처럼 보이는 한 걸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