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 사사키 다카시, 원전의 재앙 속에 살다
2011년 3월 11일 대규모 지진과 그로 인한 쓰나미가 일본 동북부 지방을 휩쓸었다. 이로 인해 후쿠시마 현(福島県)에 위치한 원자력발전소에서 방사능이 누출됐다.
대지진 당시 후쿠시마 제1원전의 총 6기의 원자로 가운데 1·2·3호기는 가동 중에 있었고, 4·5·6호는 점검 중에 있었다. 그러나 대지진으로 발생한 쓰나미로 인해 전원이 중단되면서 원자로를 식혀 주는 긴급 노심냉각장치가 작동을 멈췄고, 3월 12일 1호기에서 수소폭발이 일어났다.
스페인 사상사 교수였던 사사키 다카시 씨는 당시 후쿠시마현 미나미소마에 살고 있었다. 그는 원전사고 이후 정부의 행정편의적 피난지시를 거부하고 요양병원에 있는 노모와 치매에 걸린 아내와 함께 자택농성을 벌였다. 이 책은 그 시간동안 하루하루 써내려간 고투의 기록이다.
이 책은 지진 발생 하루전인 3월 10일부터, 2012년 12월 3일까지의 기록을 엮었다. 재난 당사자의 목소리로 생생하게 묘사된 사고 직후의 참상을 통해 원전을 둘러싼 문제들을 다시금 생각해보게 한다.
저자의 자택은 후쿠시마 제1원전에서 25킬로미터 떨어진 곳이다. 다행히 지진이나 쓰나미의 피해를 면했지만 주위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무인지대로 변했다. 피난행렬이 줄을 이으면서 그 일대는 ‘그야말로 죽음의 정적으로’ 둘러싸였다. 지원물자를 실은 트럭은 피폭된다는 ‘소문’이 두려워 마을로 들어오지 않는다.
하지만 저자에게 이 모든 일보다 더 중요하고도 시급한 일은 치매 걸린 아내의 순조로운 배변이다. 그는 걷는 것조차 힘든 치매 걸린 아내가 없었다면 자신이 이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밝힌다. 의사소통도 거의 불가능하고 매일 아기를 돌보듯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산책을 시키는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지만 아내가 곁에 있음으로써 이상한 용기와 안정감을 받는다고 고백한다.
사람은 나락의 밑바닥에서, 다시 말해 마음 깊숙한 곳,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서 타인의 상처나 슬픔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폐허가 된 곳에서 방사능 피폭의 위험과 아내의 병간호까지 신경 써야 하는 ‘나락의 밑바닥’에서 사사키 씨는 끊임없이 사유하고 자신의 생각을 전한다.
이 책을 읽는 것은 원전 대폭발이라는 종말론적 사건이 한 개인의 삶에 어떠한 고통으로 덮쳐오는지 구체적으로 목격하는 과정이다. 거대담론과 수치화된 외부의 일이 아닌, 개인의 구체적인 일상과 변화를 마주하며 나 자신의 일로 연결된다. 저자는 대재앙을 마주한 국가와 개인, 인간의 자유와 존엄에 대한 문제를 비롯, 대재앙을 대하는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지, 안전한 삶은 어떤 것인지에 대해 묵직한 물음을 던진다.
사고가 나도 대륙이라면 얼마든지 도망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좁은 일본에는 도망갈 장소가 없습니다.
동일본대지진과 쓰나미의 여파로 일어난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지금도 수많은 피난민과 생태계 방사능 오염,오염수 처리 문제 등으로 여전히 고통받고 있다.
사사키 선생은 “원자력이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연 이래, 인류는 늘 파멸의 위험에 노출되었다”고 경고한다. 그는 일본이 장래에 절대 원전을 갖지 않고, 만들지 않고, 들여오지도 않겠다는 ‘비원전 3원칙’을 제안하기도 한다.
원전 사고는 원전을 반대하든 찬성하든 모든 사람들이 피해를 입고 고통받을 수밖에 없다. 재난지역을 지키는 사사키 선생의 경고는 일본보다 원전의존율이 높은 한국에 보내는 재난체험자의 호소이기도 하다.
현재 우리나라는 영광, 울진, 월성, 고리 등에 24개의 원전이 가동되고 있다. 국가 면적에 비해 원전의 밀집도가 매우 높다. 사고 시 국가 전역이 피해영향권에 들어간다 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20대 대통령 당선인은 ‘탈원전 백지화, 원전 최강국 건설’을 핵심공약으로 내세웠다. 건설이 유보 중인 신한울 3·4호기 건설의 재개가 확실시 되었고, 기존 원전 수명연장도 추진 가능성도 크다. 현 정부서 백지화된 신규 원전 4기(천지 1·2호기와 대진 1·2호기)건설의 재추진 가능성도 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굉장한 가치, 즉 자유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알고 그것을 더욱 소중히 했다면, 현재의 일본에, 우리가 사랑하는 후쿠시마에 일어나고 있는 이런 터무니없는 사태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헌법 전문에는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한다고 명시돼있다. 원전가동은 미래세대에 방사능 위험을 10만년 이상 관리해야 할 사용후핵연료를 물려주게 된다.
2011년 후쿠시마 사고 이후 독일을 비롯한 유럽 각국은 '탈핵'을 선언하고 재생에너지 중심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또한 원전를 가동하는 여러 나라도 안전성과 투명성 관련 규제를 강화해 원전 사고를 방지하고 국민들의 생명과 안전을 부호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혹시 모를 단 한 번의 사고가 한반도와 세계를 또다시 재앙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핵발전소 공격을 보면서 제2의 체르노빌 사태를 우려하고, 울진 산불에 핵발전소 출력을 낮추고 마음 졸이는 것도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미래세대에게 핵발전으로 인한 치명적인 위협을 물려줄 수 없다.
정규석 녹색연합 사무처장은 지난 5일 진행된 탈행행동에서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헌법 35조를 인용하며, “핵발전과 핵폐기물은 분명한 재해위험이기에, 국민의 안전을 위해 핵발전이라는 재해위험은 제거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내 삶이 계속되는 한, 내 ‘이야기’는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계속 분노할 것이고, 그 정당한 분노를 에너지 삼아 끝까지 꿈을, 희망을, 이상을 이야기할 것이다.
후쿠시마 사고 11주기. 그리고 현 정부의 탈원전 정책이 사실상 백지화 수순을 밟게 된 이때, 사사키 선생의 이야기를 다시 곱씹어 본다. 삶이 계속되는 한 계속해서 이야기하겠다던 선생은 2018년 12월 18일에 폐암으로 사망했다. 하지만 그가 재앙속에서 분투하며 길어올린 글은 여전히 이 시대에도 유효하다.
후쿠시마 핵사고 11주기를 맞아 역사를 기억하고 그 교훈을 담는 정책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다음 세대를 살아갈 이들을 위해 정당한 분노를 에너지 삼아 사사키 선생의 이야기를 이어나가야겠다.
※ 건강매거진 데이드 (2022년 3월 11일)에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