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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추앙받다 가장 혐오받는 얼굴에게

[독서노트] 한정현, 《나를 마릴린 먼로라고 하자》, 문학과지성사

by 문슬아
© kimzifi, 출처 Unsplash

역사가 배제한 '폭력의 계보'를 만나는 소설. 올 해 상반기, 가장 인상깊게 읽은 책이다. 제목 《나를 마릴린 먼로라고 하자》의 마릴린 먼로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혐오받는 얼굴”이다.


나의 해방일지라는 드라마 덕분에 '추앙'이라는 단어가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데, 마릴린 먼로야 말로 “아름답다고 추앙하다가 거부하면 부숴버릴 듯 달려드는 사람들”의 세계에서 추앙과 멸시를 동시에 받았다. “가지고 싶은 여자들한테는 예쁘다 사랑한다 말했다가 자기 맘대로 안 되는 것 같으면 죽여버리는” 그 세계에서.


마릴린 먼로는 이야기의 중심은 아니지만 지금까지도 반복되는 선택과 배제의 구조 속에 희생당하는 여성, 퀴어의 '초상'의 역할을 한다.


이 소설은 ‘셜록’과 ‘왓슨’에 비유되는 인물들의 추리소설 형식으로, 잃어버린 조각을 하나씩 찾으며 ‘진실’에 다가간다.


서울 강남에서 성형외과 봉직의로 일하고 있는 구연정, 일본 도쿄에서 문화사 연구자로 일하는 윤설영의 이야기로 소설은 시작된다. 두 사람에겐 몇년 전 사라져버린, 스스로를 ‘셜록’이라 불렀던 이지연에 대한 각각의 기억이 있다. 우연한 사고로 8개월간의 기억을 잃어버린 설영과, 아픈 기억을 잊지 못해 괴로워하는 연정이 '왓슨'을 자처해 사라진 '셜록'을 찾아나선다.


© SutoriMedia, 출처 Pixabay


"셜록 없는 왓슨들”이 추리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


산에서는 ‘동지’에게, 산에서 내려와서는 공권력으로부터 성폭력을 당한 여성 빨치산 생존자 ‘의선’과 ‘춘희’, 그런 두 여자가 흠모해왔던 당대의 톱스타 마릴린 먼로, 전쟁 중 성폭력을 피하기 위해 어린 나이에 원치 않은 결혼을 해야 했던 ‘도둑 신부’들.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조직에서 가장 먼저 사라져버린 성폭력 피해자들.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학교폭력과 살인의 희생자가 된 연정의 딸 도영. 수없이 역사에서 사라져왔고 사회에서 퇴장당했던 이들의 이야기가 얽히고설킨다.


기록된 역사는 '남성'의 역사이며 그 속에서 철저하게 배제된 존재들이 있다. 전쟁의 기록 속에서 전투를 이끈 장군과 몇만의 병사들이 희생되었다는 이야기는 기록되지만 살아남은 혹은 희생당한 여성들의 이야기는 쉽게 찾아볼 수 없다.


사실 전쟁은 여성, 성소수자에게 지금도 진행중이다. 일상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가부장적 질서의 구조적인 폭력. 남자친구에게 데이트 폭력을 당하고, 내 앞날을 쥐고 있는 교수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혼자사는 여성들은 스토킹을 당하고, 여자라는 이유로 그냥, 살해당한다. 성소수자는 비정상인으로 취급받고, 동성끼리는 사랑해도 법적으로 가정을 이룰 수 없다. ‘정상’과 ‘비정상’을 자의적으로 선택하고 배제하는 사회에서 무수한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 CoolPubilcDomains, 출처 OGQ


하지만 한정현은 이 소설을 폭력의 계보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찾아내고, 살아내는 견고한 ‘사랑의 계보’로 대체해 간다. 모든 기억을 되찾고, 셜록에게 보내는 설영의 마음이 그렇다.


"당연하지. 끝까지 살아내야지. 만약 그런 일이 있어도 난 살아갈 거야. 나, 가끔 우리의 삶이 추리소설에서 탐정이 하는 가장 긴 추리 같아. 진실이 쉽게 밝혀지지 않아서 절망도 하고 실망도 많이 하지만 포기하지 않으면 그 끝엔 답도 있고 진실도 있고 보고 싶은 사람도 있는...


설사 그게 세상이 정한 답하고는 다를지라도 말이야. 그러니까 우리, 서로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도 살아내자. 살아내서 저기 인간의 시간을 벗어난 세상에서 만나서 말하자. 행복하게 살았다고, 누군가 이 기나긴 삶의 끝에 기다리고 있어서 더 행복하게 살았다고. 그 누군가에게 내가 통과한 시간을 말해주고 싶어서 더 열심히 기억하고 더 열심히 두리번거렸다고."


사진제공=알라딘

고유의 밑줄


- 그러니까 극단적 선택이라는 말은 쓰면 안 되는 거죠, 극단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선택을 하겠어요. 53

- 어떤 때든 중립은 정말 선택이 가능한 사람들이나 지킬 수 있는 영역이니까. 53

- 보이는 게 그렇게 중요한가, 누군가는 그렇게 말할 수도 있지만 '남들과 달라서 공격받는' 사람들에게 그건 정말 중요할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55

- 폭력의 고리는 그렇게 생각보다 단단하고 유구했다. 69

- 세상에서 가장 추앙받고 가장 멸시당하는 사람이 마릴린 먼로인 것 같다고. 185

- 중간이 되고 싶어도 중간이 될 수 없는 사람들이 극단으로 내몰린다는 걸 이제는 안다. 202

- 살면서 한 번도 궁금한 적이 없던 세계, 그 세계를 연정도 도영을 통해 보았다. 220

- 연정은 사실 의학사를 공부하면서 단 하나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게 바로 미국 중심의 자료 해석과 연구 방향이었다. 261

- 많은 경우 국가폭력 피해자들은 사건 발생 지역 근처에 살지 않는다. 게다가 피해의 대물림을 막고자 하는 피해 당사자들의 노력으로 3세대쯤에는 그 사실 자체를 아예 모르고 살기도 한다. 277

- "어디 갈 때마다 금지당할까 봐 무서워요. 기준에서 벗어나면 누구든 금지당할 수 있는 거잖아요." 279

- "사람들은 지키고 싶은 게 생기면......자신과 뜻이 다른 사람들은 결국 없는 사람 취급을 해버리고 마는 걸까......" 291

- "여자들은 전향하든 그곳에 남든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자수하면 끌려가서 한국 정보기관의 성범죄 위협에 노출되었을 거고 물론 그곳에 남아도 똑같았을 테고요." 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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