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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무엇이 아닌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by 문슬아


버지니아 울프는 1928년 케임브리지대학의 여성 교육 기관인 거턴 대학과 뉴넘대학에서 '여성과 소설'이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이 강연의 원고를 수정·보완해 1929년 한 권으로 묶어낸 것이 책 <자기만의 방>이다. "여성이 소설을 쓰려면 일 년에 500파운드의 돈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는 유명한 말도 이 강연에서 비롯되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첫 아이를 출산한 이후 매일같이 반복되는 가사와 육아로 내 시간은 멈춘 것만 같았다. 남편이 해외 출장이 잦았던터라 독박 신세를 면치 못하다 보니 육아 시작과 동시에 우울증이 찾아왔다. 세계를 돌아다니며 존재가 확장되어 가는 남편과 달리 내 삶은 섬처럼 고립되고, 뒤쳐지고, 청 비어버린 것만 같아 괴로웠다. 울프는 "다른 무엇이 아닌 자기 자신이 되는 것"(p.180)을 강조했는데 나는 날이 갈수록 사회의 그림자처럼 지워져갔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아주 오랜 세월동안 여성은 가부장적인 남성 중심 사회에서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로 취급당했다. 여성은 학문과 종교, 부의 세습에서 철저하게 배제되었고 자신의 재능을 펼칠 수 있는 자유가 없었다. 18세기에 이르러서야 여성 작가가 나타나기 문단에서 활동을 하는 것이 공적으로 드러나기는 했지만 그 또한 매우 제한적이었다. 이러한 시대 속에서 여성이 소설을 쓰기 위해 자기만의 공간과 소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도전적인 주장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주장은 슬프게도 2023년의 여성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것 같다.




울프는 창의적인 작가가 지녀야 할 정체성에 대해서도 치열하게 고민했다. 여성 작가 또는 작가 지망생에게 기존의 남성적 글쓰기에서 벗어나는 것은 물론, '여성적'이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나 확장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기를 제안한다.


시선의 확장, 사유의 확장. 이것은 어떻게 이뤄질 수 있을까. 이슬아 작가는 책 <부지런한 사랑>에서 글쓰기 수업을 하는 아이들과의 한 일화를 통해 글쓰기의 주어를 나에서 너로, 세상으로 확장시켜가는 부지런한 노력이 세상을 달리보는 시선을 가질 수 있게 해준다고 말한다.


가부장의 눈이 아닌, 사회 주류, 기득권의 눈이 아닌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많은 존재들의 눈으로 지금 자신이 서 있는 세계를 바라보는 노력. 내가 선 자리를 낯설게 바라보는 노력. 그 노력이 나를 진정한 나 자신이 되게 만드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눈앞에 펼쳐지는 실재의 본질을 사유하는 버지니아 울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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