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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언덕에서 감정의 핵을 마주하다

에밀리 브론테, 《폭풍의 언덕》, 문학동네

by 문슬아


책장을 열기 전까지 폭풍의 언덕은 내 상상 속에서 어떤 이미지로, 어찌보면 정형화된 클리셰로 구축되어 잇었다. 로맨스 소설이라는 것은 익히 들어왔으니 자기 사랑을 찾아 떠나기 위해 폭풍이 이는 바다를 헤치고 나아가는 용감한 여자의 모습이라던가 전쟁의 포화 속에서 결국 피지 못한 사랑의 비극이라던가 이런 이야기일 것이라 짐작했다.


이 허깨비같은 이미지는 '폭풍의 언덕'의 존재를 알리는 첫 대목부터 와르르 무너졌다. 폭풍의 언덕은 주인공 캐서린과 히스클리프가 어린 시절을 보낸 저택의 이름 (Wuthering Heights)이다. ‘비바람이 몰아칠 때 높은 곳이 감당해야 하는 대기의 격동’을 가리키는 영국 북부의 방언 Wuthering은 소설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드러내는 동시에 주인공들의 심리 상태를 나타낸다. 이 저택을 배경으로 자신의 몸과 영혼을 불태우며 온 힘을 다해 증오하고 사랑하는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이야기는 파괴적이다.


평범한 인물들은 보이지 않았고 사랑, 증오, 절망, 질투, 공포, 두려움 등의 감정의 핵심만을 뜰채로 떠 만든듯 한 인물들로 가득했다. 어딘가 모르게 기괴했는데 그렇다고 그로테스크한 다른 작품들과는 느낌이 달랐다. 방어적으로 작동하는 거리두기는 번번이 실패하고 인물들의 감정에 따라 불편하고, 불안하고, 속이 뒤집어 지는 일이 잦았다. 그런데 그 파괴를 묘사하는 언어는 환상적이고, 사실적이고, 아름다워서 그 간극 속에 나는 자주 길을 헤맸다.


그렇다고 인물들에게 깊이 공감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사랑은 그리스 비극처럼 잔인한데 그 사랑에 도달하기 까지의 사소하고 구체적인 일화들, 그들의 감정의 속도를 따라갈만한 개연성이 친절하게 주어지지는 않아서 그들이 말하는 사랑의 깊이에까지 도달할 수 없었고, 그래서 히스클리프의 인생을 건 복수의 서사가 어딘가 모르게 삐걱거리는 것만 같았다.


서른 해로 끝난 그녀의 삶에서, 그녀는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녀는 1818년에 태어났고, 요크셔의 목사관, 그 시골, 그 황야를 떠난 적이 없다. 그곳의 풍광의 혹독함은 아버지의 혹독함에 어울렸다. …… 에밀리는 줄곧 정신적 고독을 지켜냈고, 그로부터 상상력의 환영들을 키워갔다. 그녀는 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밖으로 나타난 그녀의 모습은, 착하고 바지런하고 헌신적인, 상냥함 그 자체였다. 그녀는 모종의 침묵 속에 살아갔고, 외부 세계에서 그 침묵을 깨뜨린 것은 오직 문학뿐이었다.

-『폭풍의 언덕』 작품해설 중에서


에밀리 브론테는 영국 요크셔 벽촌에 목사의 딸로 태어나 평생을 시골 목사관에서 서른 해의 짧은 생을 살다 세상을 떠난다. 폭풍의 언덕은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전 남긴 유일한 장편소설이다.


책을 읽는 시간은 서사보다는 인간이 느끼는 감정의 핵을 찾아서 깊이 파고드는 지난한 여정이었다. 인물들이 펼쳐보이는 극단적인 감정의 롤러코스터에서 모든 가면을 벗어 던진, 불순물을 다 털어낸 순수한 감정의 핵을 면밀히 들여다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회화 되지 않은 감정이라고 표현한다면 너무 과장일까. 그 핵들은 내 내면에서도 한 구석 씩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텐데, 이미 너무 페르소나가 강해진 나는 일상에서 그 핵을 마주하는 일을 최대한 피하다가 그 모든 것이 매일같이 찾아오는 악몽 속에서 구현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도 해보았다.


본질 그대로 존재하지 못한 감정들의 아우성이 공황과, 강박적인 불안증과 악몽장애로 발현되는 것은 아닌가. 프리쳇은 거칠고 삭막한 황야에서 정신적인 고독의 한계를 경험한 에밀리 브론테가 '자신의 상상력을 어두운 영혼에 내맡겨' 캐서린과 히스클리프를 창조해냈다고 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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