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기억은 아물지 않습니다.
요즘 보고 있는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는 일주일에 한 회씩만 본다. 감정 소모가 너무 심해서, 아내랑 한 회를 보고 나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음 화가 시작되기 전에 '그만 볼까?' 말을 꺼낸다. 이 책도 내 가방에서 한 달을 살았다. 이 얇은 소설책을 한 달이나 가방에 넣어 가지고 다니면서도, 찔끔찔끔 볼 수밖에 없었다.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폭력 앞에 무기력함과 우울함, 자책과 안타까움 뿐이었다. 일말의 희망도 없었고, 살면 살아진다는 위로도 없었다. 애써 외면하려는 농담 섞인 대화도 없고, 상갓집에서도 들을 수 있는 웃음소리 하나를 볼 수가 없는 책이었다.
80년 광주 민주화 운동은 내가 태어나기 전 일이라 기억이 없다. 다만, 관련된 이야기들은 어릴 적 기억에도 어른들이 쉬쉬하는 것들 중에 하나였던 것 같다. 유치원에 태극기 옆에 전두환 사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 사람은 누군데 태극기 옆에 사진이 있냐고 할머니한테 물었는데, 황급히 내 손을 잡아채며, 그러는 거 아니라고 하시며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하셨다. 학교에 가고 대학교에 진학할 때까지 내가 배웠던 광주 민주화 운동은 그저 역사 지식이었던 것 같다. 이자겸의 난, 무신 정권처럼 그저 외워야 할 하나의 텍스트일 뿐이었다.
다큐와 영화 '화려한 휴가'를 보고 많은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이후 나는 더 많은 사실을 알게 되었고, 정치 성향과 무관하게 광주 민주화 운동을 북한의 소행이라고 발표한 집단을 절대 지지할 수 없었다. 그것은 절대 합리화되어서도, 정치적으로 이용되어서도 안 되는 사실이다.
어떤 기억은 아물지 않습니다. 시간이 흘러 기억이 흐릿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기억만 남기고 다른 모든 것이 서서히 마모됩니다.
나 역시 그렇다. 그래도 나이가 들면서 좋은 것은 그 기억을 조금 더 담담히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기억이 흐릿해지지는 않는다. 더는 아프지 않고, 더는 힘들어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지금의 나는 그렇지만, 내가 책 속의 주인공이었다면 어땠을까. 생각이 많아진 채 책을 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