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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s bae Mar 02. 2024

또 못 버린 물건



네 번째 소형이사 견적문의.

"프레임 있는 싱글침대 1개 디지털피아노 1개 미니테이블 1개 의자 2개 잔짐은 박스 3개 정도예요" 다 알아서 해줄 테니 걱정 말라던 아저씨는 시중가보다 족히 두 배는 넘는 가격을 제시하며 말끝마다 너털웃음을 지었다.


기다리던 전화는 오늘도 소식이 없었다.



이삿짐리스트 중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한 흙갈색 영창 디지털피아노 KT-20. 그가 몇 달 전부터 시름시름 앓더니 이내 혼수상태에 빠졌다. 사실 다시 깨어나지 않을까 기대를 하기도 했다. 종종 그랬으니까.  이번에는 증세가 심각했다. 전원을 다시 아보고 어댑터바꿔봐도 깨어날 기미가 안보였다.



나는 초조해졌다. 이사하기 전까지 어서 전문가분을 모시고 진단을 받아야 했다. 안타깝지만 사망하셨습니다 라는 판정이 내려진다면 이삿짐리스트에서 제외함과 동시에 신속하게 내다 버 요량이었다.



3번의 전화 끝에 출장비가 가장 저렴한 전문가분께 방문을 요청했다. 이번주는 스케줄이 꽉 찼으니 다음 주 중으로 연락을 주겠다더니.. 2주가 지나도록 감감무소식. 인내심이 바닥난 나는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는 시종일관 회의적인 태도로 일관하며 출장을 꺼렸다. 그 정도 연식이면 영창수명을 다한 거라 봐야 한다는 둥 설령 메인보드 교체를 한다 해도 30은 들 텐데 그 가격이면 중고로 하나 사는 게 낫다는 둥.



잠시 고심에 빠졌다.

이렇게 또 한 번 피아노를 버리게 되는 걸까?



초등학교 장래희망칸에 늘 작곡가를 써넣었다. 음악, 어쩌면 피아노는 어린 날의 내가 유일하게 잘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키가 자라고 교복이 바뀌고 3번의 졸업식을 하는 사이 피아노 위로 소복이 먼지가 내려앉았다. 오랜 시간 조율을 하지 않아 웅웅 거리던 그것은 어느샌가 거실 한켠 우두커니 자리만 차지하는 낡은 가구가 되어버렸다. 폐기는 자연스러웠다.

  


대학을 졸업하고 몇 번의 퇴사를  경험했다. 세상살이는 영화나 드라마가 아니라는 사실 통감하며 실의에 빠져있었다. 다시 피아노 생각이 간절했다. 어렵사리 생의 두 번째 피아노를 구입 함께한 지 12년 차.



전문가분은 출장비만 날리게 될 것이 뻔하니 웬만하면 폐기처분하고 괜찮은 중고 야마하를 구입하라 조언했지만. 나는 왠지 그냥 또 피아노를 버리는 게 못내 아쉬웠다.



심폐소생술과 심장충격기처럼 피아노 전원을 껐다 켜길 반복하며 쿵쿵쿵 버튼 주변부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정신 차려!! 일어나!! 떠나보내기 전 마지막으로 의학드라마 흉내를 내보고 싶었나.



.. 갑자기 전원에 빨간 불이 들어왔. 심정지 상태에서 몇 달을 보내던 피아노가 다시 살아난 것이다. 반갑고도 당황스러웠다. 껐다 켜길 반복해 보니 버튼 부근의 두드림을 잘만 조절하면 멀쩡히 전원 불 켜졌다.



사람은 고쳐 쓰는  아니라지만 12년간 함께한 피아노는 쿵쿵쿵 두들겨가며 조금 더 함께해 보기로 했다. 아무 일 없다는 듯 태연한 그를 나는 도저히 버릴 수가 없다.


아무 일 없다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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