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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s bae Mar 06. 2024

언덕너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호기롭게 시작한 수험생활이었지만 제대로 공부라는 걸 별로 해본 적 없던 나는 몇 시간씩 노량진 학원 자습실에 앉아 있는 훈련 아닌 훈련을 시작하는 중이었다.


원룸에 난 조그만 창문을 통해 지나가는 구름과 감나무 잎사귀가 보여 괜찮다고 떠들어댔지만,


오후만 되면 학원 자습실에 신발 벗고 퀴퀴한 향기 풍기는 사람들 사이에서 내 발가락에도 비슷한 냄새가 나지 않을까 의구심이 드는 나날들이었다.


물론 성적은 기대만큼 나오지 않았다. 성적은 말이죠 가파른 우상향 곡선이 아니에요. 계단식 상승이죠. 나의 계단은 상승과 하락을 반복하며 지지부진 답보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그중 행정학은 9급 시험을 준비하며 가장 싫어 싫어를 외치던 과목이다. 수험생 주에 호불호가 분명했던 나는 행정 현상을 연구 대상으로 하는 그 학문에 눈곱만큼의 관심도 없었다. 


징징거리며 부여잡던 기출문제집에는 군데군데 명언이 싣려 있었는데 다음의 문장은 10여 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 가슴속에 콕 박혀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다. 그만큼 당시 적잖이 충격적이었지.


'지금 여기서 행복하라, 다른 날을 기다리지 말라'


젠장.. 대차게 욕지거리를 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이런 명언은 망언이 아닐까.  합격의 날을 기다린다고.


멀게만 느껴지던 63 빌딩도 남산타워도 그리고 미용실과 쇼핑과 영화관 등등등 수많은 것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모든 들은 공무원 시험 합격 너머에 있었다. 위시리스트가 이뤄질 그곳에서 지금보다 덜 불안하고 더 확실한 행복을 누릴 것이라는 믿음은 자연스러 보였다.


하지만 부실한 근거 위 허술한 믿음금세 무너져 내렸다. 역시 출근이 문제였을까? 일이 나와 맞지 않은 걸까? 조직의 시스템이 문제인 걸까? 동료나 상사가 견디기 힘든 걸까?


전부 다 맞다고 이유를 갖다 붙이고 배짱 있는 척 퇴사를 한다면, 그곳에서 지금보다 덜 불안하다거나 더 확실한 행복 같은 것을 맛볼 있을까.



...



불안을 잠재우고 행복을 느끼기 위해서 자율성과 안정성 두 가지 모두가 필요했고 이런 식의 갈등은 짜장과 짬뽕처럼  삶에 자주 등장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짬짜면을 먹을 것이다.


근무시간을 줄 안정성을 흔들고 자율성을 조금 더 획득하는 것, 그것은 온전히 나로서 살아가기 위한 나름의 모험이다.  더 이상 내일의 행복에 기대며 살지 않기로 했다. 


대신 오늘을 행복하게 만드는 다양한 재주를 개발해야 . 6살 조카처럼. 까마득한 어린 시절의 감각을 되찾는 것 한순간 되지 않다.


10여 년이 더 지나서야 어떤 철학자이던가 명사가 말했던 저 명언은 진실이라고 수긍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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