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이다. 집 근처 왕벚꽃나무길 산책로의 흙더미가1km 남짓 파헤쳐지더니 이내 LED 야간조명이 나무옆으로 촘촘하게 자리를 잡았다. 왕벚꽃나무는 몹시 당황했을 것이다. 여느 날처럼 곤히 잠자리에 들려했는데 무슨 일인지 방안에 등이 꺼지지 않으니, 이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출근하기 위해 마셨고, 버텨내기 위해 들이켰다. 연차가 늘수록 커피와 술에 대한 나의 집착은 나날이 커져만 갔다. 주로카라멜마키아또와 바닐라라떼가 후보에 오르고 깔끔함을 원할 땐 아아! 를 외쳤다. 어느 날 사무실 부근에 아인슈페너 파는 곳을 처음 발견했을 때, 콜럼버스 못지않은 가슴 벅참을 느꼈다.
퇴근 후 일드 호타루의 빛, 호타루처럼 비루! 비루!(*맥주)를 외치며 냉장고 문을 열고 노동의 고됨을 삭였고, 때로는 성공한 여자인 양 고급와인잔에 화이트와인을 홀짝였다.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어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든 순간에도, 카페인은 나를 움직였다. 내일의 에너지까지 미리 당겨 쓰듯 나를 고갈시키는데 일조했다. 시원하게 알코올을 들이키며 지친 하루를 보상받고 모든 게 괜찮아지는 듯한 착각을 했다.
밤산책을 할 때마다 야간조명에 둘러싸인 왕벚꽃나무를 본다. 이제 곧 봄이 올 텐데. 돋아난 잎사귀로 낮에는 광합성을 밤이면 이산화탄소를 내뱉을 것이다. 장시간 야간조명에 노출된 나무는 비정상적으로 호흡량을 늘린다고 한다. 스트레스로 인한 과호흡 증세라고 봐야 할까.
제대로 숨 쉬지 못하는 모양새가 어쩐지 나 같아서, 그가 신경 쓰였다.
"왕벚꽃나무 씨, 당신 괜찮아요?"
사회생활은 이렇게 하는 거야 누가 법으로 정해놓은 것도 아닌데 직급과 나이로 수직화되는 계급 속 하위층의 굽신거림은 자연스러웠다. 체화된다는 건 무서운 일이다. 가면 뒤 얼굴이 흐릿해지고 나와 가면이 구분되지 않음을 느낀 순간 과호흡이 몰려온다.
시간선택제로 전환한 후,월급은 반토막이 났지만 나에겐 충분히 광합성을 할 시간이 생겼다.술과 커피를 이용해나 자신을 고갈시키는데 더 이상 협조하지 않기로 했다.단, no커피는 사무실 한정이다. 주말에는 김밥씨(*남자친구)와 커피를 마신다. 아무런 목적 없이. 하얀색 꾸덕한 크림 위로 코코아 가루가 뒤덮인 아인슈페너를 음미하며.
금주선언은 회식이라는 거대장벽을 만났다. 여태껏 배시시 거리며 마시고 싶지도 않은 술을 많이도 들이켰다. 수없이 잔을 부딪히고 건배사가 줄을 서고 침을 튀기고 삼겹살 기름이 사방으로 튄다.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으니까 행복한 거야를 체감하는 시간.
"소주 줄까? 맥주 줄까? 아니면 어떻게.. 말아줘?" 나는 심약하고 소심한 사람이다. "아니요. 저는 사이다로 하겠습니다." 이 한마디를 하기까지 시간이 참 오래도 걸렸다. 당신이 제아무리 술병을 들고 내 앞을 서성여도 이젠적당히 타협해 줄 의향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