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에게
대개 사람들은 친구, 가족, 지인들과 이야기하며 위안과 힘을 얻는 듯하다. 특히 그들이 겪고 있는 고통이 우리의 그것과 비슷하다면 공감의 힘은 더 커진다. 하지만 때때로 우린 이상한 경험을 한다. 서로 직접 소통을 할 수 없는 대상에게 위로와 격려를 받는다. 어떻게 언뜻 보면 가는 실로도 이어져 있지 않은 관계에서 현재 떠안고 있는 삶의 짐이 가벼워질 수 있을까?
내 일상의 최근 화두는 소설 쓰기다. 처음 도전하는 일이어서 그런지 도통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사실 무엇을 써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쓰려고 하는 바가 소설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쓰고 있는 게 결국 소설이 될 수 있을지를 잘 모르겠다. 그리고 너무 주제를 대사로 다 분출해 버리는 건 아닌지, 소설이란 건 원래 주제를 정하고 시작하면 안 되는지 등 고민이 끊이지 않는다. 좀 더 많이 독서하고 내면과 인간을 탐구해본 후에 내 안에서 쓰고자 하는 주제가 떠오르면 그때 시작해야 하는 건지도 고뇌한다. 오전에 쓰기 시작하면 자주 가만히 앉아 있다가 이내 소설 읽기로 도망을 친다. 조금이라도 더 읽으면 도움이 되겠지 생각하며 말이다. 결국 시간이 지나 점심을 먹고 다른 일을 하러 간다. 그리고 밤이 되면 좀 더 소설다운 주제를 생각하며 침대에 눕는다. 세상과 나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흐른다. 자신에 대해 더 생각하고 거기에서 주제를 찾고 싶지만, 자신에게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할지도 모르겠다. 무언 갈 알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그걸 모르니 답답하다.
이럴 때면 세상에 나만 있는 것 같은 고독감이 든다. 물론 세상에서 난 가장 고통스럽지도, 가장 불쌍하지도 않다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어떤 압박감에 짓눌릴 때는 주변은 작아지다 없어지고 엉성한 자신만이 남는다. 거기선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내 주위에 소설 쓰는 사람을 찾아 이야기를 나누며 조언을 구하고 감정을 공유하고 싶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런 사람은 없었다. 이러한 상황이 다행인 이유는 만일 그런 사람이 있었다면 난 그 사람의 소중한 시간을 침범했을 것이고 또 누군가 있었다면 스스로 무언 갈 얻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첫술에 배부르고자 한 오만함으로 자신의 무능력을 한탄하고 있을 때 물음 하나를 머릿속에서 발견했다. ‘작가들도 처음부터 잘 썼을까?’ 그러자 내면의 한 자아가 ‘프랑수아즈 사강은 19살에 '슬픔이여 안녕'을 썼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의식이 자아를 포박했다. 포박된 눈치 없는 자아를 때리며 닥치라고 했다. 그 덕분에 다행히 몇몇 천재를 제외하곤 대부분이 처음엔 소설을 쓰며 힘든 시간을 보냈을 거라는 결론을 냈다. 물론 이 결론의 논거는 허약했다. 내가 개인적으로 아는 작가가 없을뿐더러 글을 잘 쓰면서 여전히 자신의 실력에 의문을 품고 있는 몇몇 작가들의 이야기를 들은 게 전부이기 때문이다. 사실관계를 떠나 이를 사실이라고 여기니 왠지 마음이 편해졌다. 대부분의 사람이 겪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니 고독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나만 힘든 게 아니었구나!’ 남이 조언으로 다가오면 경기를 일으킬 법한 이 문장을 스스로 느끼니 위로와 격려가 되었다. 그러니 또 다른 내가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제발 써라...... 소설 같지 않은 글이 나와도 되니 하루에 한 문장이라도 써라!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