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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감성 Feb 13. 2023

동네 우편배달부

- The Postman -


  어렸을 적 동네 우편배달부가 되고 싶었던 때가 있다. 항상 좋은 소식을 전해주는 사람으로 기억돼 있어 간혹 우편배달부 아저씨와 마주치는 일이 생기면, 혹시 우리 집에 오는 편지는 없느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오늘도 개와 동네를 산책하다 여러 번 우편배달부와 지나쳤다. 기억 저 아늑한 곳에 자리하고 있던 옛 향수가 불려지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꿈이라는 단어를 인식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어릴 적 나는 항상 좋은 소식만을 전해주는 동네 우편배달부를 보고 그를 동경하였다.


  내가 어릴 적엔 우편배달부 아저씨가 집에 찾아가면 전달해 주는 것 편지이든, 등기이든, 소포이든 개의치 않고 건네는 크기와 내용에 상관없이 집집마다 각양각색의 이것 또한 크기와 맛에 상관없이 마실 것과 먹을 것을 내주었다. 그것을 본 후로 나도 커서 동네 우편배달부가 되면 언제나 동네 사람들이 반갑게 맞이하고 위와 같은 것들을 얻어 먹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동네 우편배달부가 되고 싶었다.


  모든 사람들이 우편배달부를 좋아해 주고, 반겨주니 일의 강도와는 무관하게 돈도 많이 벌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만약, 다소 적더라도 이렇게나 좋은 대접을 매일같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예전에는 집집마다 젊은 이(사내)가 없는 집도 있었는데, 가끔씩 우편배달부가 일을 거들어 주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글공부를 못해 까막눈이신 어르신들을 위해 편지를 대신해서 읽어주기도 하고, 무거운 짐을 들어주기도 하고, 소질이 있다면 갖가지 물건들을 고쳐주기도 했다. 더더욱 좋았던 것은 집에 들르는 시간이 밥 때와 맞을 때는 기꺼이 끼니도 해결하고 가는 걸 종종 보았다. 그 당시, 내게 이보다 더 좋은 직업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멀리서 온 반가운 소식을 전해주는 사람이 멀리서 온 사람만큼이나 고마웠던 게다. 다들 그때는 그랬다.


  반대로 우편배달부가 힘듦을 참아내야 하는 경우도 있다. 한 여름과 한겨울에 언덕 높은 곳까지 올라가거나, 홀로 먼 외딴 곳까지 편지를 주고 와야 할 때도 있고. 혹은 누군가의 부고를 알리는 편지나 군대로 끌려 나가야 하는 입영통지서나 전쟁터에서 전사하였다는 비고를 담은 편지를 전할 때는 누군가를 대신해서 그 어느 누구보다 욕을 먹는 욕받이가 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럴 때 같이 울어주는 배달부가 있는 반면, 그간의 고마움은 잊은 채 편지만 전해주고 황급하게 달아나는 배달부도 내 기억 속에 분명했다. 나라면 분명 같이 울어주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이후로 시대가 발전하면서 전화가 보급되고, 우편을 통해 소식을 알리는 것보다 빠르고 편한 전화를 사용하는 수가 늘어, 자연스레 우편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수가 현저히 줄었다. 최근에 우편으로 받은 것들 중 대부분은 고지서가 가장 많고 가끔씩 보내지는 소식지가 전부다. 비록 전화가 편하고, 빠르고,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어서 좋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는 아직 손으로 직접 쓴 손 편지를 좋아한다. 젊은 시절 내 별명은 편지 학과였다. 군대 시절 짝사랑하던 이에게 그리고 해외에 있던 시절에는 가족에게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다.


  요즘도 길에 지나다 우편배달부를 보면 가벼운 인사를 건넨다. 어릴 적 꿈에 대한 반향일까 지금도 우편배달부를 보면 친근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본다. 


"내게 잘못 온 것은 없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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