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공공재를 키우고 있다. 공공재가 무엇일까. 바로 우리 아이이다.
아이가 공공재라니 의아할 수도 있다. 그러면 아이는 부모의 사적 소유물일까? 이것도 쉽게 수긍하기 어렵다. ‘보이지 않는 가슴’을 쓴 경제학자 낸시 폴브레는 아이는 공공재라고 한다. 아이는 모두의 힘으로 태어나고 자라난다. 갓난아이는 돌봄과 교육을 받아 성장하고 그들이 지니게 되는 능력과 인품이 사회에 퍼져 효과를 낸다. 그들의 능력으로 구성원 모두가 이득을 보게 되는 것이다. 만약 아이가 제대로 된 돌봄과 교육을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사회 해악으로 연결된다. 그렇게 때문에 사회는 부모의 노력을 인정하고 보상해야 하며 부모가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할 경우 대신하여 아이가 좋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럴 듯 부모의 영향력이 절대적으로 미치는 영유아기 초기 몇 년을 제외하고는 아이는 주변 영향을 주고받으며 사회 구성원으로 성장한다.
얼마 전, 또래 아이를 키우는 엄마와 대화를 한 적이 있다. 3월 새 학기에 아이를 처음 기관에 보냈는데 집에서 키우던 때와 달리 사탕과 같은 군것질을 스스럼없이 아이에게 먹이는 모습을 보니 망연자실한 감정이 든다고 했다. 이야기를 듣고 ‘아! 이제는 부모 품을 벗어나 사회가 아이를 키우구나’하고 생각을 떠올렸다. 아이가 내딛게 되는 사회가 어떤 곳이냐에 따라 아이의 미래도 그려진다. 그래서 노키즈존이나 아동학대 뉴스, 출산과 양육에 쏟아 붓는 세금을 비난하는 이들을 보면 마음 한켠이 씁쓸해지는 이유이다. 이는 아이가 부모의 소유물, 즉 사유재라는 생각 때문이다. 소유물로 비롯된 비뚤어진 감정은 아이를 마음대로 처벌하거나 부모의 욕심으로 과한 사교육 등 아이의 삶을 통제하게 된다. 내 아이만 잘되면 된다는 생각, 주변이 어떻게 병들든 상관없이 우리 가족만 잘되면 된다는 가족중심주의가 된다. 넓은 범위에서 바라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자주 미래를 떠올린다. 아이는 어떤 모습으로 자랄까? 어떤 친구들을 사귀고 무엇을 배우게 될까? 사회는 얼마나 더 불안하고 혼란해 질까 등등. 물론 자신의 적성에 맞는 직업에 훌륭한 인품을 가진 어른으로 성장하기를 바라지만 모든 건 나의 역량을 벗어나는 일이다. 아이가 공공재라는 생각을 하는 순간, 언젠가는 날려 보내야 하는 어린 새를 키우는 양육자의 심정이 된다. 새가 떠나갈 사회라는 숲이 안락한 환경이 될 수 있도록 시대를 살아가는 내가 할 일을 떠올린다.
공공재를 키우는 마음, 한 아이는 모두의 아이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