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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 Nov 26. 2024

암은 사형선고가 아니다.

넷플릭스 <지옥> 과 암에 대한 변명

대장내시경을 통한 조직검사 결과가 나왔다. 림프종은 아니지만, 대장암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진단을 받았고, 수술 등을 할 수 있는 다른 병원으로 이동할 것을 안내받았다.

암 병기는 대장내시경 조직검사로는 확정할 수 없다. CT검사와 조직검사 결과로 의사들은 암 가능성 여부를 추측하고 수술 일자를 결정한다. 물리적 수술과 그때 떼어낸 조직으로 병기 검사를 시행한다. 따라서 암은 수술 이후 최소 일주일 지나야 만 정확한 병기를 알 수 있다.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조직검사 결과를 전달하는 의사를 마주한 나는, 의외로 담담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면 다들 하늘이 무너질 거 같은 표정으로 절망하곤 했는데, 나는 그 현실을 체감하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고, 다시 병상에 누워 1시간 정도 멍 때리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부모님에게 전화를 해 조직검사 결과를 전달할 때서야 비로소 울먹거렸다.


내가 암이라는 사실에 대한 절망감에 대한 눈물보단, 부모님에게 암이라는 소식을 전달한다는 행위에 대한 자책의 눈물에 가까웠다. 부모님 입장에선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젊은 딸이 암에 걸렸다는 사실은 청천벽력 같은 뉴스일 것이다. 흔히 자식으로서 가장 큰 불효는 부모님 보다 먼저 죽는 것이라고 하지 않는가. 물론 암이 곧, 죽음을 의미하진 않지만 "그럴 가능성이 생겼다"라는 것 자체가 이미 그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것이다.


암은 사형선고가 아니다.

대부분 질병은 진단받지만, 암은 '선고'받는다. 마치 법정에서 판사가 죄수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처럼, 암과 같이 죽음의 가능성이 짙은 병을 선고받는 것이다. 그 순간 암 환자들은 "내가 대체 뭘 했길래"라는 생각부터 시작해 자책을 한다. 가족이나 가까운 지인마저 "아니, 네가 대체 왜?" "어쩌다가?" 란 반응을 보이기 때문에 마치 나의 생활 습관 중 무언가가 잘못됐기 때문에 암에 걸렸다란 생각을 하게 된다. 선고받는다는 단어 자체가 내가 한 어떤 행위로 인해 누군가에게서 '무죄'인지 '유죄'인지 판단받는 어감을 준다.


특히 젊은 나이에 암에 걸리면 더욱 그렇다. 흔히 암이 50대 이상에게 흔한 질병인 이유는, 노화로 인해 면역력이 감소하고 세포가 변형될 가능성이 그만큼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젊은 나이에 암에 걸리면, 뭔가 이 사람이 잘못된 생활을 했기 때문일 거란 인상부터 가지는 것 같다. (나도 암에 걸리기 전까지 그러했다.)


암은 원인을 알 수 없는 질병이다. 잘못된 식습관, 음주, 흡연 등을 거론하지만, 이는 암뿐만 아니라 다양한 질병의 근본 원인이 된다. 평생 음주와 흡연을 해도 건강하게 사는 사람이 있지 않는가. 지난 10년간 내가 어떤 생활을 했는지 되돌아봤을 때 그렇다 할 만한 특이사항은 없었다.


대학생활 한창 즐길 20대 때 남들만큼 음주를 자주 했고, 한때 다이어트 스트레스로 인해 굶다가 폭식했던 경험이 있지만, 사실 이 정도는 누구나 20대 창창한 나이에 한 번쯤 가져보는 나쁜 생활습관이지 않는가. 오히려, 그 생활에 대한 반성으로 20대 중반부턴 운동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하면서, 클린한 식단을 시작했다. 인스턴트 음식과 패스트푸드를 원래부터 좋아하지 않아서, 한 달에 한번 이들을 먹을까 말까였고, 통밀/호밀빵, 오트밀, 야채, 닭가슴살, 블루베리 등 인터넷에 검색하면 나오는 대표 건강식품들을 즐겨 먹을 정도였다.


그나마 보통 한국 사람들과 다른 점이었다면, 1주일에 쌀밥을 2~3회 정도 먹을 정도로 통밀빵, 호밀빵, 파스타류를 자주 먹었다는 점이다. 식단이 서구화되어 있었지만, 흔히 나쁘게 말하는 서구화된 식단이라기 보단 나름 건강한 서구 식단이라고 자부했다. 운동할 때도 PT쌤이 내가 먹는 식단으로 잔소리를 한 적도 없다. 오히려 "아침을 참 건강하게 드시네요" 칭찬을 받을 정도로, 나는 나의 건강한 아침식사에 자부심을 가졌었다.


운동도 한때는 주 7 일할 정도로 집착한 적이 있었고, 암 전조 증상으로 장이 마비되기 직전까지도 난 주 3일 복싱장에 가서 운동을 하곤 했다. 운동을 억지로 하는 게 아니라, 운동하는 것을 즐겨했다. 장기간 해외여행을 하면, 항상 산을 찾아 등산을 했을 정도다. 흡연은 전혀 하지 않고, 종종 위스키와 와인을 마신다. (30대에 들어서면서, 소주는 거의 마시지 않았다) 알코올 중독이라기 보단, 금요일밤이나 토요일 딱 기분 좋게 술을 마실 정도였다.  


즉, 누군가가 "대체 뭘 했길래 이 나이에 암에 걸린 거야"라고 물으면 난 당당하게 "내가 잘못한 건 없는데"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나름 건강한 생활을 영위해 왔다. 즉, 암은 내가 그동안 살아왔던 나의 생활방식을 부정당하는 결과물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감히, 누군가가 "당신은 이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암에 걸렸습니다"라고 판단해 선고하는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옥>에서 죽음 고지를 받는 장면 ©넷플릭스

넷플릭스 <지옥> 시리즈에선 소름 끼치게 생긴 천사가 불현듯 나타나, "OOO, 너는 O월 O일 O시 지옥에 간다"라고 죽음을 고지한다. 고지한 시간에 맞춰 무시무시하게 생긴 저승사자들이 고지받은 자들을 패대기치고 잔인하게 그들을 지옥으로 데려가는 모습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심리적 공포를 유발한다. 과학적으론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이 기현상을, 정진수란 사람이 "죄인에 대한 천벌"이라고 해석하며 새진리교란 종교를 만들어낸다.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고지받은 사람=죄인"이란 이미지를 심겨주며, 그들이 고지받은 데에는 결국 그만큼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비난한다. 하지만, 갓 태어난 갓난아기마저 곧 고지를 받는 일이 발생하며, 새진리교의 논리에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이 생긴다.


결국, <지옥>에서의 죽음 고지는 죄인에 대한 단죄가 아닌, 불현듯 찾아온 재해나 사고에 가깝다. 그저 운이 나빴을 뿐이다. 죽음을 고지받았다는 사실로, 그 사람이 살면서 저지른 소소한 나쁜 짓을 샅샅이 파헤치며, 원인으로 지목하는 것은 인과적 오류에 가깝다.


즉, 젊은 나이에 암에 걸렸다는 사실로 그 사람이 분명 무언가를 잘못했기 때문에 (술을 많이 마셨거나, 인스턴트식품을 많이 먹었다던가) 걸렸을 거라 지레 짐작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도 그동안은 인식하진 못했지만, 암에 걸려보니 유튜브나 소셜 콘텐츠 등에 "이렇게 하면 암에 걸립니다" 하는 류의 콘텐츠와 그곳에 달린 수많은 댓글을 살펴보면, 결국 암의 원인은 암환자의 잘못으로 원인을 돌리는 것 같아 마음이 괜히 아프다.


물론, 잘못된 식습관과 생활습관은 암에 걸릴 확률을 높여주기 때문에 경각심을 가지는 것은 좋다. 다만, 건강한 생활습관을 가진 사람들도 언제든지 걸릴 수 있기 때문에 암은 나의 잘잘못 여부를 판단해 선고받는 게 아니라,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재해나 사고처럼, 그저 운이 나빴을 뿐이라고 여기는 것이 환자의 입장에서 덜 억울하다.


혹시나 주변 사람, 사랑하는 사람이 암에 걸렸다면 "대체 뭘 했길래 암에 걸렸냐"는 질문을 삼가는 게 좋다. 가뜩이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안 되는 환자의 입장에서, 죄책감을 가지는 것보단 "운이 나빴을 뿐"이라고 생각하고 긍정적인 마음가짐을 형성하는데 더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브런치 실시간 인기순위 7위에 올랐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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