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차장을 수백바퀴 돌았던 이유
정신을 차리고 보니, 환자복을 입고 수액 트레이를 곁에 두고 있었다. 트레이에는 물을 포함한 금식을 해야 한다는 표시판이 붙어 있었다. 살면서 입원이란 걸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모든 상황이 낯설었다. 다른 환자들과 공동으로 사용하는 4인실에선 ㄱ자 형태로 드리워진 커튼으로 최소한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했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수시로 드나들며 커튼을 제치고 환자의 상태를 점검했고, 침대마다 설치된 개인용 TV들은 낮 시간 대에는 내내 켜져 있었다. 양옆에서 들려오는 다른 TV소리에 머리가 질끈 아파왔다. 스마트폰을 보면 속이 울렁거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침대에 무력하게 누워있는 것이었다.
아직 암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대장 내시경 등을 통해 떼어낸 조직 검사 결과가 나와야 하는데 이게 생각보다 금방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병원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조직검사 결과를 받기까지 최소 5일~1주일 이상 소요된다. 이 말은 즉슨, 그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병원에서 그저 영양수액에 의존하며 끙끙 앓아야 한다는 것이다. 수시로 배가 아프고 구역감이 몰려왔지만 의사와 간호사들이 종종 진통제를 놔주는 것 말곤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조직검사 결과에 따라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상급병원으로 이동해 그에 걸맞은 치료를 받게 된다.
새벽부터 주차장을 돌기 시작한 이유
틈만 나면 세계 여행을 할 만큼 역마살이 가득한 내게, 병동 생활은 정신적 고문에 가까웠다. 그나마 창가 침대라면 바깥 풍경이라도 멍 때리며 바라볼 텐데, 비행기 가운데 좌석처럼 양 옆 다른 환자들 사이에 누워, 그저 ㄱ자 커튼으로 겨우 만든 이 좁은 공간에선 천장 무늬의 점 숫자를 세거나 커튼 주름 수를 세는 게 다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단순 갑갑함을 넘어서 가슴이 턱 하고 막히는 것 같은 우울감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것이다. 스마트폰은 입원당시 가방에 넣어두고 안 꺼낸 지 이틀이 지났다. 무료할 때 읽어야 지란 생각으로 들고 온 두꺼운 책은 집중을 요하는 어려운 책이었던 탓에 몇 문장 읽다가 그냥 덮어버렸다. 간헐적으로 밀려오는 복통과 구역감은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제일 힘들었던 것은 음식 냄새였다. 물마저도 마실 수 없는 금식을 하는 내 입장에선 매일 아침, 점심, 저녁 다른 환자들 앞에 식사가 놓일 때마다 구역질이 날 거 같았다. 그래서 식사 시간이 되면 수액 트레이를 끌고 밖으로 향했다. 어디 산책이라도 하고 싶은데 수액 트레이를 들고 갈 수 있는 데는 지극히 제한적이었고 주변에 산책할만한 작은 공원도 없었다. 병원 앞은 주차장이었고, 주차장 밖엔 자동차가 지나가는 대로 이외에 갈만한 곳도 없다. 무엇보다 덜덜덜 거리는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 이 수액 트레이를 끌고 울퉁불퉁한 보도블록을 지나가는 것은 은근히 성가셨다. 보도블록이나 점자블록에 걸릴 때마다 행여나 수액이 역류할까 봐 여러 번 살펴봐야 했기 때문이다.
이동반경이 제한된 상황에서 내가 바깥공기를 마시며 걸어 다닐 수 있는 곳은 주차장이 유일했다. 참 안타까운 것은 환자들이 갑갑해서 나와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병원 건물을 따라 설치된 나무 벤치에 앉아 주차장을 조망하는 것밖에 없다는 것이다.
언젠가부터 나는 이 주차장을 돌기 시작했다. 특히 아침 일찍 병원이 문을 열기 전, 텅텅 빈 주차장을 좋아했다. 아직 차들이 들어오지 않은 시간, 차가운 아침공기를 마시며 수액 트레이를 끌고 주차장을 계속해서 돌았다. 똑같은 동선만 하염없이 반복되다가 차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그때마다 동선은 변경되었다. 약 세 시간 간격으로 밖으로 나와 주차장 도는 것을 반복했는데, 나무벤치에 쪼르르 앉아 주차장을 바라보는 환자들 앞에서 나만의 걷기 쇼가 펼친 셈이었다. 특히 낮시간 대에는 20~30명 넘는 환자들과 보호자들이 주차장을 멀뚱멀뚱 쳐다보곤 했는데 나름 그들 앞에서 쉬지 않고 계속 주차장을 걸어 다니는 내가 구경거리이지 않았을까. 매일 주차장을 돌던 내가 사라졌을 때 이들은 나의 부재를 느낄까. 그런 쓸데없는 잡념이 들곤 했다.
여행할 땐 하루 3만~4만보를, 일상생활에서도 운동하는 시간을 제외하고 1만보를 채워왔던 나는 병원에 입원하면서까지 이 1만 보 링(아이폰 내 건강 앱은 하루 목표로 지정한 운동량, 걸음수를 달성하면 '링'을 형성한다)을 꾸준히 달성했다. 주차장 걷기란 내 병동 루틴이 없었더라면, 난 이 짧은 1주일 입원을 버티는 게 더욱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혹시나 나처럼 입원과 함께 우울함의 구렁텅이에 빠진 사람이라면 주차장이건 어디건 걸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기분 환기가 될 뿐 아니라, 거동이 자유롭다는 것에 대해 새삼 감사함을 느끼게 된다.
1주일 고향지역의 A 종합병원에서 입원 후 조직검사 결과에 맞춰, 이후 서울 B 병원으로 이동해 약 2주 병동생활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