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딸딸한 상태에서 하는 독서의 매력
고백하자면 나는 술을 좋아한다.
20살부터 24살까지는 술 자체보다는 술자리를 좋아했다.
술을 잘 먹었고, 술자리는 거의 빠지지 않고 갔다. 체력마저 좋아서 한번 술을 먹으면 밤새서 먹는 일도 꽤 잦았다. 심지어 술부심도 있는 몇 안되는 여자캐릭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 때는 혼자서 술을 먹어본 적도 없고, "혼술하면 알코올 중독 수준이야"하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때 였다. 그 때의 나에게는 술이란 '사교'의 도구였지, '음미'의 대상이 아니었다. 소주를 잘 먹긴 했지만 소주는 취하기 위해서 먹는 것이었고 맥주는 소주가 역할 때 대신 먹는 술이었다.
24살부터 슬슬 맥주에 빠졌다.
특히 혼자서 집에서 맥주1개씩 홀짝홀짝 하기 시작했다. 자기 전에 맥주를 시원하게 한 캔 하고 자면 꿀잠자는 그 매력에 푹 빠진 탓이다. 그리고 유럽 생활도 한몫했다. 거의 물처럼 싼 맥주들을 한짝 (30병) 사놓고 방에서 심심하면 까서 초콜릿이나 와플과자 안주삼아 먹는 거다. 그 땐 1일1맥이라고, 매일매일 맥주 다이어리도 썼다. 정말 하루에 1병씩 맥주를 마셨고 나중엔 맥주 테마로 여행도 떠났다.
그래도 나는 28세가 되기전까지 맥주 이외의 다른 술을 혼자서 마셔본적이 없다. 여전히 "혼자서 소주나 도수가 10도 넘는 술을 먹는 것은 알코올 중독 초기 증상이야"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다른 술의 맛을 아직 잘 몰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30이 된 요즘,
맥주와의 권태기가 시작되고
와인, 사케, 위스키 등의 술에 슬슬 눈을 뜨기 시작했다. 문제인 것은 이것들을 혼술하기 시작한 것이다.
원래 와인, 사케, 위스키 맛을 잘 몰라서 그리 주도적으로 먹는 편은 아니었는데 언젠가 부터 내 돈주고 와인과 사케를 사기 시작했다.
특히 사케의 경우 일본에서 10도수가 훌쩍 넘는 스트롱 과일 사케에 빠지고 난 후 (도수가 3~4도 밖에 되지 않는 과일소주와는 차원이 다르다) 10도가 넘는 상큼한 술이 너무 땡겼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에선 내가 마트갈때마다 찾아봤지만 10도가 넘는 살짝 상큼한 소주나 술이 별로 없었다. 깔라만시 소주가 있긴 한데 뭔가 부족했다. 일본에서 싹쓸이 해 온 스트롱 과일 사케는 처음엔 약 15개 남짓있었던 것이 거의 2주만에 사라졌다.
도수가 10도수 초반인 술들의 장점은 적은 잔으로 도수가 높기 때문에 살짝 알딸딸해지게 만든다. 정신은 말짱하다. 그저 살짝 붕뜬 느낌이다. 그 상태에서 내가 좋아하는 소설책들을 읽는 거다. 경우에 따라선 어떤 소설에는 감정 이입이 좀 과하게 되기도 한다. 물론 요즘엔 이런 일이 많이 없다. (요즘 내가 자주 읽는 책이 추리소설인데 추리소설에 감정이입한다는 것은...흠. 여기까지)
옛날에 가끔 책맥 (책과 맥주)를 즐겼을 때는 알딸딸한 상태에서 책을 읽기 위한 목적보다는, 그냥 밤에 음료 한잔 훌쩍이며 책이란 걸 읽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요새는 살짝 나를 술 속에 담궈 흐리멍텅해진 상태에서 책을 읽는다. 이러니깐 무슨 알콜중독자가 하는 궤변같지만, 난 딱 글라스 한잔만 하고 일주일에 두어번 이런다는 것. 으로 선을 그으려고 한다. (물론 소주는 먹지 않는다. 나는 상큼하고 맛있는 술을 먹고 싶기 때문에. 역한 맛 나는 술은 별로다. 소주먹으면서 책을 보는 것은 아직까진 시도할 수 있는 레벨이 아니다.)
나는 이러한 나의 생활(?)을 이름하야 '술독(술과 독서)'라고 붙였다.
딱 하루에 한 글라스, 좋아하는 술 (10도이상되는 술)을 옆에 두고 가볍게 읽을 소설을 한 권 다 읽는다. 책을 비교적 빨리 읽는 편이기도 하고, 술독할 때는 그리 어려운 책을 읽지 않기 때문에 한 두시간이면 다 읽는다. 가장 재밌는 책은 뭐니뭐니해도 추리소설이다. 추리소설은 그리 꼼꼼하게 읽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살짝 알딸딸한 상태에서 읽기에 최적이다. 물론 중간에 어려운 논리나 트릭 설명이 있을 땐 잠시 정신을 붙잡으며 그것을 몇번이고 반복하지만 이내 포기하고 그냥 넘어간다. 사실 서양권 고전 추리소설 (아가사크리스트, 코난 도일, 엘러리 퀸 등)에 비해 요즘 현대 추리 소설은 트릭이 복잡하고 이런 것보다는 그냥 이야기 플롯 서사에 더 집중하는 느낌이 있어서 추리소설의 형태를 빌린 일반 소설 같은 느낌도 든다. 그래서 비교적 쉽게 읽는다. 이 부분에 대해선 다음에 자세히 다뤄보기로 하고.
어제도 마트에서 산 10도짜리 배상면주가 스파클링 술을 한병 옆에 끼고 대만에서 꽤 유명한 신작 추리소설 한권을 다 읽었다. 영상의 홍수에서 조금 멀어지고 싶어서 넷플릭스를 끊은지 한달째, 다시 독서하는 삶으로 돌아왔는데 술독에 빠진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