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림길
헤매다.
많은 사람들이 잘 걸어가고 있다. 목적지도 있는 듯하고 힘차고 빠르게 자기 걸음을 재촉한다. 좌우 주위를 둘러보는 법도 없이 다부진 표정으로 자기 길을 간다. 그렇게 사람들이 흘러가는 것을 그냥 지켜본다. 그 속에 섞이면 나 역시 흘러갈 것을 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똑같이 딱딱한 얼굴을 하고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가 나름 긴장이 사라지면 쓰러지듯 무너져 정신을 잃고 또 다음날에 귀신같이 부활해 새로운 시작을 할 수도 있다. 그럴 수도 있다.
근데 그렇게 사는 게 내게 힘이 든다. 한순간 편안해지는 듯하다 또 미친 듯이 속이 끓고 사납게 짖고 물어뜯고 있는 게 보인다. 집안에서 키우면 안 되는 개를 집안에 묶어두면 개가 길이 안 들어서 혼자 미쳐 날뛸 때가 있는 것처럼 내가 딱 그 짝이다. 내 속이 시끄러워서 주변에 사나워지고 예민해지는 걸 느낀다. 웃으며 다른 사람을 상대하기 때문에 그럭저럭 넘어가도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든다. 상대가 아니라 내가 문제라서 사람과의 관계가 항상 힘들다. 그래서 미안하다.
남들이 하는 것을 하지 않았다. 그냥 그 흐름에서 나왔다. 버틴다고 될 일이 아님은 한참 전에 알았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머리를 깎아야 하는 것일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런데 목표도 없이 수행을 한다는 것도 그분들께 죄송했다. 그냥 어릴 때 나를 스치어간 형상들이 몇 있었다. 이상의 ‘날개’ 그리고 알렉산더 대왕과 거지 철인 디오게네스의 이야기를 스치면서 고등학교 때 강렬하게 끌리는 방향성은 분명히 있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분명히 정신의 자유였다. 그러기 위해서 단단한 마음과 흔들리지 않는 중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먹고사는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은 수많은 탐구를 하는 중에도 길은 찾지 못하고 다시 밥벌이를 하러 가야 하는 상황에 절망하게 된다.
거리의 철학자로 노동과 사람의 관계 안에서 삶을 더욱 깊게 파고들고 그 속에서 진리를 탐구하고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도 있겠지만 허약한 나의 몸은 쉽게 지쳐버리고 생각은 굳어지고 그냥 하루의 편안함을 위해 일과의 효율성을 고민하면서 인간관계에 시달리는 내 모습을 여러 번 감각한 나는 아마 거리에서 노동으로 철학을 할 수 있는 그런 타입의 사람은 아닌가 보다. 그래서 내 식대로 사는 방법을 연구하고 고민해 왔지만 솔직히 글을 써서 살 수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과거에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을 느꼈을 때는 그것이 이야기라고 생각했었다. 고교시절 게임 시나리오를 가지고 토론하고 놀았던 기억 때문인지 나는 어쩌면 그런 쪽의 일을 할 수 있지나 않을지 고민하고 그런 종류의 글도 여러 개 기획하고 여자 친구에게 보여준 적이 있는데 그때 반응이 그냥 굳어져서 아무 말도 못 하는 것을 보고 글을 써서 먹고사는 것은 아예 접고 글 자체도 메모 수준의 글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나는 최근에야 내가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 감을 잡아가고 있다.
나는 잊는 인간이다. 나는 간직하는 인간이 아니었다. 세상에는 셜록 같은 사람들도 있다. 그는 인간의 지식 저장공간은 제한되어 있고 쓸 수 있는 에너지도 유한하기 때문에 자기에게 필요한 지식만을 골라서 취해야 하고 그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로 꿰고 술술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어야 직관과 그 밖의 관찰력이 자동으로 발휘되어 탁월함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사람이다. 전문가 타입이다. 존재하는 문제를 해석하고 파악하고 풀어내는 데 재능이 있는 사람이다.
그에 비해 나는 그런 재능이 없다. 나는 무엇을 통으로 기억하고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나는 잊는 것이 장기인 존재이다. 그 많은 책을 읽었어도 책 제목을 보면 생각나는 구절이 하나도 없는 것이 수두룩하다. 어떤 책을 읽고 ‘그 책 어땠어요? 내용 중에 기억나는 것 있어요?’라고 누가 물어보면 나는 얼굴이 빨개졌다. 아무것도 머리에 남는 것이 없어서 마치 읽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책은 도끼다.’라는 것을 보면 책을 제대로 읽지 않아서 그런 것이라는 진단이 있는데 정말 나는 독서를 진심으로 하지 않는 것인가? 하는 회의감에 깊이 빠진 적이 많았다. 그런데 나는 그런 식으로는 독서 자체가 되지 않는 사람이었다.
난 많은 책을 읽고 그 내용을 다 잊어버린다. 그리고 내가 필요한 조각 하나, 둘만 남긴다. 영화, 만화 그 밖의 모든 정보매체에서 정보를 취득해서 통이 아니라 필요한 한 부분, 장면을 남기고 나머지는 다 잊어버린다. 그리고 그 정보의 파편들이 내 머릿속에서 어떤 주제와 만나면 그냥 사방에서 하나로 연결이 된다. 흩어져 존재하는 그 정보들이 연결성을 갖기 위해서는 반드시 머릿속에서 디테일이 사라져야 한다. 정보에 디테일이 너무 많이 붙어있으면 그 정보는 다른 정보와 융합하지 못한다. 어떤 것을 반복적으로 공부해서 그 내용을 통으로 머릿속에 집어넣어 버리면 그 정보는 그 틀 안에서 절대 빠져나오지 못한다. 탁월해지지만 엉뚱한 것을 상상하는 능력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머릿속에 생각이 떠오를 때 그것을 메모하려고 하면 힘든 것은 말은 한 단어 한 단어 이어서 써야 하지만 아이디어는 전체가 통으로 머릿속에 나타난다. 그것도 어느 특정 상태에서만 머리에 불이 들어온 것처럼 아이디어의 전체 윤곽이 보이는 것이다. 머릿속의 뉴런들이 마구잡이로 연결되어 결합된 것이지만 그 결합력은 상당히 떨어지고 곧 불이 꺼지게 되면 머리에 남은 키워드 한두 개로는 떠오른 아이디어의 전체 모습을 다시 복구하는 것이 상당히 어렵다. 암기식 지식이 고정된 것과는 다르게 떠오르는 아이디어는 유동적인 상태이기 때문에 잡아두는 것도 어렵고 특정 상태를 한번 벗어나면 다시 떠올리기도 힘이 든다.
난 이런 식으로 그때그때 결합된 어떤 결과물을 내놓는 사람이다. 기존의 정보를 그냥 기억하고 활용하기보다 엉뚱하게 결합해서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 내는 사람이다. 나는 셜록 시리즈에서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범죄를 만들어 내는 그런 타입의 인물이며 셜록은 만들어진 문제를 푸는 타입의 사람이다. 이 둘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방향성이 다른 것이다. 나는 머릿속이 말랑말랑해지면 엉뚱한 이야기들이 쏟아지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전혀 엉뚱한 그림들이 쏟아질 때면 나는 좀 업이 된다. 기분이 좋고 스스로 자신감도 넘친다. 문제는 이상태는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원상태로 돌아와야 되고 그럼 몸에서 다시 무엇인가 분비되는 것을 느낀다. 기분이 가라앉는다. 그리고 엄청 자괴감이 들고 자기 파괴적이 된다. 낙담하고 좌절한다. 최근에는 이것이 호르몬 작용이라는 것을 직감하고 있다.
난 이 감정 상태를 다룰 수 있는 수행이 되어있지 않다. 그래서 힘들다. 최근 조급한 것은 내 안에 지금 써야 할 글들이 다 나오지 않는다면 이 글감들은 그냥 소멸할 것이라는 것을 직감하기 때문이다. 먹고사는 것을 위해 다른 일을 해야 하는데 지금 쓰는 글은 지금이 아니면 쓸 수 없다는 초조감이 나를 또 헤매게 만든다. 시간이 조금만 더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