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
할아버지 댁과 외할머니 댁은 둘 다 내가 사는 곳에서 좀 떨어진 다른 마을에 위치해 있었다. 친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연세가 많았지만 꾸준히 밭일을 하고 소도 먹이셨기 때문에 언제나 분주하셨다. 당연히 손주를 보살필 여유가 없었고 나는 외삼촌과 함께 사시는 외할머니 댁에 자주 맡겨졌다.
첫 번째로 기억나는 집은 개울 근처의 녹색 대문 집이다. 집에 큰 호두나무가 있었던 것이 떠오르는데 마루며 방이며 턱이 높아서 그곳을 올라서기가 내게는 무척 버겁다는 느낌이 나는 집이었다. 아궁이에 장작을 때던 냄새, 큰 솥뚜껑이 스르릉거리는 소리, 담장 안에 아주 작은 텃밭이 있고 그곳에 떨어지는 빗물 방울을 바라보던 나는 아직 너무 작아서 세상의 모든 것이 높고 크기만 했다.
두 번째 집은 초록 대문 집에서 한 100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두 배정도는 더 큰 집이었다. 그곳은 큰 외삼촌과 작은 외삼촌이 결혼 이후 같이 모여살 던 집이었고 두 분 다 공무원이셨기에 다른 곳으로 전근 가기 전까지 대가족으로 함께 모여 살고 있었다. 큰 감나무가 두 그루 있었고 텃밭도 두 배는 더 컸다. 계절마다 제비가 찾아오고 곶감을 만들기 위해 감을 깎아 매달고 메주를 뜨고 구석방에서는 누에를 먹였다. 우리 집에서는 항상 아버지의 선반작업 소리, 용접 소리 등이 났는데 외할머니 집은 항상 차분했지만 색깔이 참 다채로웠다. 집 앞 길 건너에 동산이 있어서 그늘이 지는 우리 집과는 다르게 안개가 자주 끼지만 햇살이 정말 눈부시게 들어와서 마루에 누워 있으면 그냥 기분이 너무 좋았다. 외할머니는 젊은 시절에는 엄마와 외삼촌들에게 엄청 엄하셨다고 한다. 밖으로 행상을 다니는 일이 쉬울 리가 없고 그런 과정에서 당연히 강단 있는 성격이 되신 것 같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게 엄하기만 하시지는 않았다.
하지만 까불이인 나는 장난을 치다 외할머니에게 회초리를 맞은 기억은 몇 번 있는데 그러던 중 한 번은 방 안을 뛰어다니다 장판에 미끄러져 몸이 공중으로 붕 뜬 적이 있었다. 뒤통수부터 바닥에 떨어져서 머리가 정말 깨져버렸고 피가 철철 나는 사고가 되었는데 그 와중에 나는 다친 것보다 외할머니에게 혼이 나는 것이 더 무서워서 벌벌 떨고만 있었다. 바닥에 피가 묻어있는 것을 보고 얼른 치우지 못해 안절부절못해하던 내 모습은 지금 생각하면 그만큼 어른들의 반응에 민감한 아이였던 것 같다. 혼나는 게 너무 무서웠던 나를 외할머니가 발견하고 놀라서 수건으로 싸맨 다음에 꿰매기 위해 보건소를 데려가는 중에도 외할머니가 화를 내지나 않을까 그것이 조마조마했다. 그래서 보건소에서 바늘로 꿰매는 중에도 엄살 한번 부리지 않고 그냥 할머니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그땐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외할머니였던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 치료를 받고 돌아올 때 외할머니가 손을 꼭 잡아줘서 그게 너무 좋았던 이 기억은 이상하게 힘들 때면 나를 찾아와 불쑥 나의 내면에 솟아난다. 소독약 냄새와 손을 따뜻하게 꼭 잡아주던 그 느낌은 언제나 덩어리로 나에게 찾아오고 그럼 왠지 그리운 마음이 든다.
한 여름에 나에게 수박을 제일 많이 잘라주던 곳도 외할머니 댁이었는데 형은 어머니와 함께 있고 외할머니 댁에는 혼자 맡겨지는 경우가 많아서 그곳에선 내가 가장 맏이가 되었다. 그래서 간식을 챙겨줄 때 언제나 선택권이 많은 것도 너무 좋았고 수박도 한 쟁반 가득 썰어서 마음껏 욕심을 부릴 수 있는 게 행복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도 수박을 보면 햇살이 쨍한 날에 마루에 앉아 할머니가 썰어주던 수박에 온 마음을 빼았기던 그때가 가장 많이 떠오르게 된다.
분명히 엄하고 무서웠던 분인데 어느 순간 그냥 그리운 분이 되었다. 부천에 올라와서는 형의 도시락 반찬을 준비하기 위해 매일 나를 끌고 시장을 다녀오셨는데 중학생인 형의 반찬은 비엔나 소시지 등을 챙겨주면서 나머지 형제들은 다른 반찬들을 해주었던 기억이 서운하게 남아있는 것을 보니 외할머니도 맏이를 유독 각별하게 챙기고 염려하는 그 시대의 전형적인 어른이었다. 그럼에도 학기 초에 학교에서 호된 일을 당한 나에게 외할머니는 그 자체로 마음의 지탱 목이었다. 부모님이 안 계시는 동안에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한 그곳에서 급하게 집으로 돌아온 뒤 외할머니가 맞이해 주는 것만으로 마음의 위안이 되었고 그렇게 외할머니를 따라 장을 보러 다니면서 서서히 주변 상황에 익숙해져 갔다.
어린 시절 기억 속에서 언제나 함께 였던 외할머니는 부모님이 올라오신 뒤로 다시 외삼촌댁으로 내려가셨고 그 이후로 건강이 계속 안 좋아지셨다. 점점 혼자 거동하는 것이 힘들어지셔서 그 이후 내 기억 속의 외할머니는 방에서 누워있는 모습을 보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언제나 우리 형제들에 대한 걱정이 많았고 특히 엄마를 안쓰러워하고 염려하셨다. 이후에는 언제나 아프셨던 외할머니. 나이 먹고 자주 찾아뵙지도 못했는데 어느 순간 요양병원에 입원하시고 그 병원도 겨우 두 번을 찾아뵙고 외할머니는 돌아가셨다.
갈수록 말라가고 골다공증으로 쉽게 뼈가 부러지고 아물지 않아 마지막까지 고생만 하신 외할머니에게 자라면서 제대로 효도 한번 하지 못했다. 분명 어릴 때 어머니 이상으로 보살핌을 받고 깊이 따른 외할머니를 그 이후 너무 소원하게 지내면서 무심했다. 그것이 계속 마음속에 응어리로 남는다. 무언가 내가 떳떳하지 못했다. 난 어느 순간부터 마음으로 스스로 죄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최선을 다해 공부도 취업도 연애도 결혼도 하지 못했다는 그런 생각 그런데 그 당시 난 내가 왜 그렇게 방황하고 겉돌고 있는 지를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뭔가 내 안의 소중한 것이 부서진 것처럼 허하고 무기력하고 짜증스러웠다. 그런데 이유는 알지 못했다. 생각을 하기도 내 안을 들여다 보기도 그때는 왜 그렇게 버거웠을까? 그때 내가 조금만 더 정직했더라면 용감했더라면 조금은 덜 돌아왔을 수도 있겠지만 자기 마음공부가 원래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법이니 그냥 이제는 나라도 스스로를 이해해야겠다.
외할머니 장례식에서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지만, 가끔씩 외할머니가 온통 마음속에서 살아나 다시 그때처럼 손을 꼭 잡아주는 그런 느낌일 때가 있다. 잠에서 깨어날 때, 혼자 깊은 고독에 빠질 때 그런 순간에 그런 감정이 갑자기 찾아오면 난 숨죽여 울어본다. 이상하게 그렇게 마음이.. 외할머니의 따뜻한 손에 끌려 들어가는 그런 순간들이 이 나이에도 아직도 있다.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