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무게
어머니를 따라 집 가까운 마트를 다녀오는 일이 있다. 멀지 않은 거리지만 골다공증에 허리 통증까지 있으신 어머니는 이제 장본 물건을 들고 집에 오는 것이 버거우신 거다. 삶의 무게가 차곡차곡 쌓여서 어머니의 어깨 위로 내려앉고 이제 허리도 많이 굽으셨다. 장본 바구니를 내가 들고 돌아올 때면 어머니는 항상 하시는 말씀이 있다.
“그때 니 할머니가 장에서 무를 하나 사서 들고 오시는데 그걸 들고 계단을 못 올라가셔서 나한테 무 좀 들고 올라가라고 하시는데… 그걸 들어보고 난 속으로 이 가벼운 걸 왜 무겁다고 하시는지 그걸 이해 못했다. 근데 지금 내가 무 하나를 들고 집에 못 오는 그런 상황이 되니 엄마가 그때 얼마나 힘들게 무를 사서 시장에서 집까지 들고 오셨는지 알겠고 그 생각을 하니 자꾸 눈물이 난다.”
어머니는 마트에서 장을 볼 때마다 어린 우리 4형제를 따라 부천까지 올라와서 고생하신 외할머니 생각에 자꾸 눈물이 나고 목이 메신다. 그때는 아직 젊었고 삶이 팍팍해서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없었기에 느끼지 못했던 감정들이 시간이 한참 지난 지금에야 후불로 어머니 가슴속에 파고드는 것이다. 몸이 공감하기 시작하자 어긋난 시대의 마음들이 그렇게 만나는 것이다.
아버지는 무뚝뚝했지만 어른들 앞에서는 수줍어했다. 시골집을 수습하고 올라오셔서 용접일을 다니시는 얼마간은 외할머니가 있었기에 집안에서 큰 소리는 없었다. 하지만 그 당시 농기계 수리일을 정리하고 올라와서 낯선 곳에서 바로 기반을 잡는 것이 어려웠고 할 수 없이 어머니는 보험설계사 일을 주변 권유로 시작하면서 집안 전체가 좀 어수선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외할머니는 건강이 안 좋아지셔서 외삼촌 댁으로 내려가셨고 집안의 공기는 딱딱해졌다. 지방일을 나가셨기에 아버지는 집에 있는 시간이 짧아졌고 어머니와의 사이에는 말다툼도 잦아졌다.
아버지는 크게 화를 내시고 어머니는 주로 듣기만 하시다가 어느 순간에는 폭발하듯 말을 쏟아 내셨는데 안에 담아 두신 것이 많은 어머니의 말은 때때로 꽤 날카롭게 마음을 파고들었다. 어머니의 한풀이는 가끔 우리에게 날벼락처럼 떨어지기도 했는데 그게 당시에는 몰랐지만 내 안에서 커다란 죄의식으로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아버지에 더 적대적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버지와 어머니 구도에서 항상 어머니는 당하는 쪽에 서 있었기에 우리 형제는 아버지보다는 어머니에 심적으로 더 동조하게 되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아들은 어쩔 수 없이 아버지의 위치에 서게 된다. 가끔 삶이 힘에 겨워지고 책임이라는 무게가 어깨를 짓누른다. 용접공 이셨던 아버지처럼 공사현장에서 일하면서 주위에서 안전사고를 크게 당하는 사람들을 보고 또 지친 몸으로 완전히 녹초가 되어 홀로 집으로 돌아올 때면 그땐 어쩔 수 없이 시간을 넘어 지난날의 아버지에 공감하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 삶의 팍팍함과 하소연할 곳 없는 외로움이 반가운 가족을 만났을 때에도 더 이상 자신을 반기지 않고 피하는 자식들과 지쳐있는 아내를 보면서 화로 터져 나오는 것을 어쩔 수 없이 공감하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냥 그때 아버지를 좀 더 반겨주고 꼭 안아줬으면, 그렇게 할 수 있는 인식의 공감대가 우리에게 있었다면 어땠을까? 이런 것이 부질없는 희망이다.
그래서 4형제 중에 한 명은 여자였어도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럼 아버지에게도 좀 더 살갑게 굴 수도 있었을 테고 아니어도 지금 즈음에 어머니에 더 공감하고 축 처져버린 어깨를 감싸 안아줄 수 있을 텐데 형제와 아버지 속에서 그렇게 섬처럼 늙어가시는 어머니가 가끔은 너무 외롭게 느껴져서 아프다. 그리고 어머니가 하시는 말씀과 지금 얼마나 힘이 드신 지 영원히 나는 알 수 없을 것이라는 것에 가끔은 안도하고 있는 이 마음이 참 서글프다. 때론 너무 무거운 마음을 공감한다는 것은 너무 아프고 힘든 일이기에… 어머니의 그것이 내 안에는 없어서 같은 것을 감각할 수 없는 내가 죄송하고 언제나 어머니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 외에는 드릴 것이 없는 나인데 그 말조차 제대로 안 되는 아들이라 항상 답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