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면하다.
꽤 자주 왔던 구간이라 낯익은 풍경이다.
아프다는 것은 내가 지금 허약하다는 것이다. 변화할 때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약해진다. 탈피를 위한 그 고통의 순간은 항상 처절하게 약해진다. 그로 인해 자신의 껍질을 벗어나지 못해 몸부림치다 죽어가는 생명체도 무수히 많다. 모든 변화의 순간들은 아프다.
익숙한 생활 속에 파묻혀있을 땐 자신이 망가져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한다. 떨어진 체력, 적은 운동량, 불규칙한 식사, 그리고 많은 시간 지쳐 쓰러져 잠들던 불면의 시간… 이 모든 것을 조합하면 결국 자기 학대라는 답이 나온다. 몸과 마음이 망가지지 않는다면 그것이 이상한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생활의 중독 속에 있을 때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조금 여유가 생긴 마음은 내게 잠들 수 있는 시간을 허락했다. 이제 잠들기 위해 누울 때마다 귓가에서 크게 울리던 초침 시계의 거슬림은 더 이상 없다. 피곤한 듯하여 누울 때마다 더 날카롭게 파고들어 나를 깨우던 주변의 자극들도 이제는 없다. 나의 공포가 나의 내면을 날카롭게 만들어 나를 위협하고 있었다는 것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더 이상 빗소리 어플의 소리가 없어도 잠들 수 있다는 것이 좋다.
잠들고 깨어나는 시간이 점점 정상 궤도로 돌아가니 몸이 아프기 시작한다. 그동안 계속 아팠지만 자각하지 못하던 각 부위들이 삐꺼덕거리기 시작한다. 감각이 돌아오니 당연히 느껴져야 하는 것들이 느껴지는 것이다. 근육들은 힘이 부족하고 내부는 그 자체로 엉망이라는 것을 알 것 같다. 신경성 위염, 장염 이것은 그냥 나의 오랜 친구였고 너무도 익숙하였기에 가끔씩 위와 장에서 고통이 느껴져도 그냥 저절로 괜찮아지는 것이라고 무시했다. 몸이 부서질 것처럼 아프니 나의 속도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 것 같다. 토할 것 같이 메스껍고 뭔가 부글부글 하는 느낌이 든다.
갑자기 이러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내가 관심을 두지 않다가 이제야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진지하게 인식하니 그동안 쌓인 것이 많은 위와 장이 내게 시위하며 투정을 부리는 것이다. 몸이 귀찮고 힘이 하나도 없지만 그래도 뭔가 잘 먹어야 할 것 같다. 기름진 음식보다 죽같이 먹기 편한 음식을 좀 알아봐야 할 것 같다. 언젠가 돌아올 빚덩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정신 사납게 웅성 되는 내면의 소리에 이끌려 그냥 되는대로 몸을 마구 굴린 대가가 이제부터 청구되는 것이다.
‘겸허하게 잘못했음을 인정하고 앞으로 잘하기 위해 노력해 보겠습니다.’
약해진 몸에는 항상 뭔가 허무주의가 스며들기 좋은 터전이 마련되는 것 같다. 항상 이쯤이 되면 ‘완벽주의, 도덕주의’가 시끌시끌하게 떠들면서 나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아주 맹렬하게 몰아붙인다. 그래서 여기부터는 꽤 익숙하다. 약해지면 누구나 기억 속에 처박아 두고 있던 온갖 이불 킥 사건들이 다시 떠오르고 그것들이 항상 ‘위선’이라는 말로 변화를 시도하는 나를 매도한다. ‘일관성’ 참 좋은 말이다. 나도 여전히 참 좋아하는 말이었다. 그래서 일관성이 없는 모든 것들을 위선이라고 비난하고 매도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동안 ‘일관성’이 어떻게 유지되는지 그 내용은 심도 있게 알지 못했다. 인간은 그 자체로 모순된 존재이다. ‘선’을 추구해도 아주 쉽게 ‘이익’이라는 ‘악’에 물들고 또 지나치게 선을 추구하다 방향성을 잃고 그 자체로 냉혹한 악이 되어버리는 경우도 역사에서는 자주 목격하게 된다. 우리는 ‘선’과 ‘악’이 딱 분리되는 존재도 아니고 그것을 명확하게 구분할 ‘깨달음’이라는 것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영원히 알기 위해 노력해도 우리는 아주 일부의 파편을 가지고 전체를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 우리의 모순은 그 자체로 우리의 숙명이다. 그냥 우리는 방향성으로 좀 더 좋은 인간이 되기 위해 살아가는 삶의 태도만 결정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삶의 태도를 유지하기 위해서 제일 먼저 배워야 하는 것이 ‘실패하는 법’이다. 나는 살면서 한 번도 진지하게 실패하는 법을 배워본 적이 없다. 이 실패하는 법은 유도의 ‘낙법’과 같은 것이다. 남을 메치기 전에 내가 잘 떨어지는 것을 배워야 모든 배움이 시작되듯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성공하는 것보다 실패하는 법을 먼저 배워야 한다. 실패하는 법을 잘 배워야 매번 쓰러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다. 언제나 주위에서는 ‘실패하지 마라. 실패하지 마라. 성공해라. 성공해라.’라고 외친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매일 실패한다. 10개를 성공해도 실패한 1가지를 극복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을 학대하는 것이 ‘나’라는 존재이고 그게 바로 완벽주의이며 고칠 수 없는 병의 실체다.
몸이 약해지니 머릿속에서 온갖 허무주의가 쏟아진다. 기분이 그냥 떨어진다. 내가 뭔가 세상에 다시없는 쓰레기가 된 기분이다. 그래 그런 ‘기분’이다. 기분은 감정이고 사실이 아니다. 그것을 이제 좀 구분해서 잘 받아들이고 참아내고 익숙해지자. 이 구간에서 얼마나 많은 이탈을 경험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이 구간을 지나도 잘 뚫린 고속도로 같은 길은 나오지 않는다. 앞은 보나 마나 명절 때 민족 대이동으로 꽉꽉 막힌 고속도로처럼 속 터지는 정체구간의 연속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자신의 내면의 허약함을 마주해야 할 시간이다. 그냥 나 자체가 모순적이며, 위선적이며, 너무너무 허약하다. 그것을 인정한다. 그것에 어떠한 변명도 하지 않는다. 그게 나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나는 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내가 그런 걸 추구하면 안 될 이유는 없잖아? 지금까지 계속 실패해 왔고 앞으로도 계속 실패할 테지만 그럼에도 그것을 추구하는 게 죄는 아니잖아? 그렇지 않니? 앞으로도 좋은 날은 없겠지만 그래도 잘해보자.
지치지 마라. 맘이 지치면 모든 것이 끝이다. 뭘 이룰 필요도 없다. 삶은 그냥 사는 거다. 우리가 고수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그냥 삶의 태도를 결정할 수 있는 그 자유뿐이다. 그것마저 놓아버리면 그땐 진짜 아무것도 없다. 아플 때 ‘징징’되는 것을 이렇게 공개적으로 해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아 모르겠다. 오늘도 그냥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