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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터피터 Jul 28. 2021

아버지..

찍지 못한 사진

마음씀 [찍지 못한 사진]  https://brunch.co.kr/@photothink/179


마음씀님의 글을 좋아한다. 언제나 글을 읽으면 내 속에 이미지가 만들어지고 그것들은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이야기가 된다.


나는 사진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사진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진 찍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내게는 내 모습을 담은 사진이 거의 없다. 왜 그랬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사진에 찍힌 내 모습이 어색했던 것이다. 우리는 매일 거울을 보면서 익숙해진 자기 모습이 있다. 그런데 사진 속에서 어색한 표정으로 렌즈를 주시하는 내 표정은 항상 굳어있거나 지나치게 작위적이다. 그런 것이 싫었다. 정확하게는 싫었다기보다 어색했다. 실제의 내 목소리, 나의 익숙하지 않은 다른 행태와 표정 그리고 뭔가 어색한 글.. 다 내가 싫어한다고 생각하는 것들이지만 사실은 그냥 어색해서 쑥스러운 것들이다. 나는 이만큼이나 숫기가 없다.


휴대폰이 이렇게 편리해지고 좋아졌기에 세상의 모습을 담는 것은 훨씬 쉬워졌다. 그러나 내가 사진을 잘 찍지 않는 이유는 내가 찍고 싶은 모습과 핸드폰에 담기는 이미지의 모습이 결괏값에서 너무 많은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내가 담아두고 싶은 순간은 이것이 아닌데, 너무나 아쉽게 이 결과물이 나의 실력이라는 것을 그냥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 그것은 왜인지 상처가 된다. 핸드폰의 잘못이 아니다. 카메라 기술의 잘못도 아니다. 단지 내가 이 기기와 이미지를 다루는 방법을 모르고 있기에 내가 원하는 것을 손에 넣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을 알고 있다. 그럼 또 이번에는 부지런하게 배울 생각은 하지 않고 좋은 결과만 욕심낸다는 내면의 비판이 일어난다. 이런 과정이 스스로를 상처 내는 방식임을 알기에 어느 순간부터 이미지를 사진이 아니라 그냥 마음속에 하나의 느낌으로 남겨두는 것에 익숙해져 버렸다.


그럼에도 내 마음속에는 아직 간직하지 못한 이미지가 너무 많다.


언제나 아버지를 사랑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사랑하기 때문에 너무 아픈 사람이 아버지다. 아버지와 나는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아왔고 그래서 삶의 방식이 다르다. 그 다름을 아버지는 나의 철없음으로 이해했고 나는 아버지의 평가를 ‘옳고 그름’의 잣대에서 잘못된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서로가 만나면 언제나 상대의 생각이 바뀌면 이 모든 문제가 풀릴 것으로 생각하고 자기 신념과 주장을 상대에서 설파하고 전도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서로 다른 종교가 만나면 웬만하면 비극적인 종말밖에 도출되지 않는다는 일반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우리 부자의 이야기는 항상 불화와 다툼 그리고 얼굴 붉히기로 끝맺음하였다.  나는 나의 옳음을 나의 정체성으로 착각했고 그것을 포기하는 것은 나의 자아를 포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광신도의 기본자세가 아주 잘 갖추어져 있었던 것이다.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아서 삶을 다르게 해석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그것은 일종의 취향이다. 단순하고 시끄럽지 않고 몸과 결과로 모든 것을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아버지의 방식은 아버지 시대에는 지극히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사상이었다. 나는 그것의 수혜를 입어 훨씬 다채로운 방식으로 사고할 수 있지만 결괏값에서 사회가 널리 인정할만한 어떤 구체적 실체를 도출하는 것에는 대단히 취약한 약점을 가지고 있다.


아버지가 과거 도스 체제를 기반으로 아래한글을 돌리고 그것으로 훨씬 단순 명료한 글쓰기를 한다면 나는 윈도우를 바탕으로 훨씬 무거운 프로그램들을 이것저것 돌려서 나름 화려한 글쓰기를 하지만 결괏값만 놓고 봤을  아버지에게 그런 화려함은 그냥 눈속임에 불과한 것이다. 나는 최근에야 아버지와 나의 운영체제가 아예 기본부터 다르다는 것을 인정할  있게 되었고 아버지의 단순 명료함이 때론 과격하지만 그로 인해  사명감이 우리 여섯 식구의 삶을 꾸려올  있는 바탕이 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일  있게 되었다. 아버지의 삶을 부정할 이유도 없고 나와 다른 생각을 한다고 그것을 고칠 이유도 없다. 단지 그것에서 파생하는 아버지의 자기 파괴적인 감정들을 내가 달래줄  없다는 것이 계속 안타까울 뿐이다.


운영체제가 다르면 호환성이 다르고 그것을 연결하기 위해서 많은 중간 단계가 필요하기 마련이다. 내가 전하고 싶은 것은 아버지의 고단한 삶을 나는 존경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렇게 살 수 없다는 단순한 사실과 아버지를 언제나 그냥 사랑한다는 마음뿐이다. 이것이 아무 왜곡 없이 아버지의 마음에 전해져서 그 딱딱해진 가슴에 조금의 위로라도 되었으면 좋겠지만 나의 온기는 차가운 아버지의 아픔에 다가 서기에는 너무 허약하다. 그냥 언제나 해주고 싶은 것은 단 하나, 나의 맘이 전해지도록 꼭 껴안아 드리고 싶다. 나의 삶이 아버지의 눈에 위태롭고 철없어 보여도 나름 최선을 다해서 살고 있고 그리고 그 속에서 나는 나름 행복하다는 것을 아버지가 이해하실 수 있으면 좋겠다.


아버지가 자기 삶이 실패했다고 하시는 그 외침을 나는 아니라고 저는 아버지의 삶으로 인해 존재하고 생각하고 살아갈 수 있게 되었기에 아버지 삶은 절대로 실패가 아니라고 반박해 드리고 싶지만 사람의 느낌이라는 것은 외부에서 통제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다. 그냥 지금은 하루하루를 정성스럽게 살아서 나의 삶의 태도가 아버지에게 진정성 있게 전해질 수 있는 그 순간이 언젠가는 오게 될 것이라는 것을 그냥 믿고 싶다.


어릴 때 난 아버지의 웃는 모습이 좋았다. 그 ‘웃음’이 그 자체로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나는 아버지의 정면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내가 보는 모습은 언제나 아버지의 등이었다. 힘들게 무언가를 끌고 가는 그 모습이 내게는 숨 막힘이 되었다. 사람의 등을 보고 대화를 할 수는 없다. 그냥 등에서는 삶의 고단함만이 느껴질 뿐이다. 가장의 짊어진 책임감의 무게가, 그 쉴 수 없는 고뇌가, 그럼에도 만족할 수 없는 결과가 다 싫었다. 내겐 어느 순간부터 아버지의 앞모습이 없다.


더 이상 아이가 아닌 어른 대 어른으로 아버지를 보려 한다. 아버지의 그 피곤함 속에서 나는 마모되는 나를 보았다. 그래서 그것을 정면으로 바라보기가 힘들었다. 그렇지만 상대에게 진심을 전하기 위해서는 항상 마주 보고 상대의 표정을 보아야 한다. 내 안에 아버지의 웃는 모습이 없다는 것은 앞으로도 살아가면서 내내 나를 짓누를 상실감과 죄책감이 될 것이다. 나는 아버지의 웃는 모습을 찍고 싶다. 내 마음속에 단단히 찍어 두어서 그것을 바라보면서 삶의 지침으로 삼고 싶다. 나와 다르지만 그렇지만 묵묵하게 그 무거운 짐을 끌고 오신 아버지의 삶이 스스로에 의해서도 인정받았으면 좋겠다. 아버지가 만족하여 크게 웃는 모습을 찍어 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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