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 타협, 협력
밀란 쿤데라의 걸작으로 소개되는 장편소설. 참 매력적인 제목을 가졌기에 그 두께에도 불구하고 집어 들어 읽기 시작했지만 잘 읽히지 않았다. 그렇지만 중간에 포기하기에는 뭔가 아쉬워 끝까지 읽었다. 분명 다 읽었다. 그래서 내 안에 무엇이 남아 있을까? 없다. 단 한 명의 인물도 내 기억 속에는 없다.
내가 언제 이 책을 읽었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아마 10년은 더 전에 읽었던 것 같고 그 당시 이 책의 주제와는 전혀 상관없는 다른 무엇에 정신이 팔려있었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이렇게나 지운 듯이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으면 당황스럽고 또 창피한 것이 일반의 반응이지만 그냥 요즘은 그러려니 한다. 나 자신의 세계관가 결이 맞지 않는 것을 나는 이해하지 못하고 그것을 소화하지 못한다는 것을 이제야 인정할 수 있게 되면서 이 책을 읽을 당시에 나의 세계관이 이 대작을 소화하기에는 너무 협소하였을 것이라고 추정해 본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책의 제목은 너무나 매력적이다. 그냥 지금의 나의 상태를 이 책의 제목보다 더 잘 묘사할 수 있는 문구가 달리 있을 수 있을까?
삶의 주도권. 자기 결정권. 중요한 가치이다. 하지만 내가 내 삶의 진정한 주인이었던 적이 얼마나 될까? 많은 경우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왔다고 생각하지만 알고 보면 거대한 착각이다.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거의 살지 못한다. 무언가를 하는 것은 나의 결정의 영역이 아니었다. 나는 왜 내가 해야 할 일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할까? 하는 궁금증은 항상 있어왔다. 내가 결정하고 하기로 했으면 집중력은 그냥 따라와야 하는 것처럼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집중력은 많은 부분 감정의 영역이다. 일단 흥미와 기분이라는 녀석이 적절히 뒷받침을 해주지 않는 상태에서 나의 집중력은 쉽게 발휘되지 않고 유지되지도 않는다.
즉 감성적인 부분이 뒤에서 보조해주지 않는 이상 집중력, 몰입의 상태로 나는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걸 항상 억지로 그냥 하려 했다. 그 과정이 너무 자주 반복되면서 나와 나의 무의식은 많은 부분에서 틀어져버렸다. 안 되는 걸 억지로 하다 보니 가슴이 답답해지고 그냥 터질듯한 스트레스만 쌓여갔는데 그 원인을 제대로 진단하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바람을 쐬기 위해 잠시 일어나거나 다른 것에 흥미를 돌리기 시작하면 그것이 무엇이든 나는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난 스스로 그것에 큰 관심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나중에 허무감과 무력감을 느낄 것을 알고 있었지만 답답한 마음을 풀기 위해 질주하는 감성의 폭주는 항상 난폭했다. 그리고 난 번번이 그 폭주에 함께 동조하고 있었다. 습관적 패배였다.
나 같은 타입이 무언가를 꾸준히 하기 위해서는 감성 또는 무의식의 영역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특정 주제에 접근해야 하고 자신과의 약속은 꼭 지켜야 하며 불쑥불쑥 일어나는 감정 변화도 꼼꼼하게 체크해야 한다. 불안이 이렇게 커져있는 상황에서 나는 모든 자극에 아주 쉽게 빠져들지만 그 이유는 불안을 달래기 위한 임시방편일 뿐이다. 하기 싫은 일들, 현실적인 일들 그리고 무수히 실패했던 과거의 일들은 그 자체로 불안을 크게 자극한다. 그러면 자연스러운 사고 활동 자체가 되지 않는다.
똑똑한 사람들이 가끔 전혀 엉뚱하고 바보 같은 결정을 내리는 일을 우리는 여러 곳에서 목격할 수 있다. 역사를 보아도 그렇고 현실에서도 뭔가 홀린 듯이 바보 같은 결정을 하는 사람들을 나는 종종 본다. 그리고 나도 그런 바보 같은 결정을 자주 하는 사람이다. 이유는 자기 대화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자기의 결점을 알면서도 어떻게 그것을 고쳐야 할지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 현재의 나를 보면 참 비루하고 비참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이토록 한심하고 바보 같은 꼴이라니 그냥 존재 자체가 한없이 가볍고 비굴해 보인다. 무엇을 한다는 것은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나는 무언가를 하기 위해 나의 감성과 무의식을 아주 잘 구슬려야 한다. 비위를 잘 맞추고 눈치도 잘 봐야 한다. 무의식이, 불안이 난리를 치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웃기는 것은 이 무의식이 글쓰기는 아직까지 좋아한다는 것이다. 글쓰기를 시작하고 지금까지 한 번도 글쓰기 자체가 스트레스가 된 적은 없었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 호르몬 작용인지 업과 다운이 반복되는 감정 기복은 참아내기 힘들었다 하지만 아주 깊게 몰입하여 기계처럼 계속 글을 쓰는 것 자체에 매달리지 않고 적당히 제동을 걸어주는 식으로 그 감정 기복은 서서히 조절이 가능해지고 있다. 매일 꾸준하게 글을 쓰는 것 자체에만 집중하고 글의 수준과 완성도를 크게 따지지 않는 부분이 완벽주의를 피해 갈 수 있는 요령이 되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스스로 자아라고 생각하고 있는 이성이 할 수 있는 부분은 무엇을 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무엇을 꾸준히 하는 것은 내 맘대로 할 수 없다 그래서 이 글쓰기도 내일부터라도 기분이 내키지 않게 되면 당장 하나의 단어조차 쓰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일을 추진하는 엔진은 이성이 아니라 감성과 무의식의 영역에 속한 것이라고 이제는 이해한다. 하지만 대신 나는 감성이 하고자 하는 모든 일을 멈출 수 있다. 그래서 멈추는 것에서 주도권을 회복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멈춘다는 것이, 무엇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
멈추어 있는 매 순간 나는 쫓기는 느낌이 든다. 무언가를 하고, 어떤 정보라도 받아들여서 자꾸 나를 채워야 할 것 같은 허기를 느낀다. 매 순간 그렇게 해야만 손해를 보지 않을 것 같다. 그렇게 손해를 보지 않고 계속 시간을 쌓아가면 나중에는 뭔가를 얻어낼 것 같지만 이것 자체가 그냥 망상이고 집착이다. 멈추지 않으면 관성에 의해 그냥 하던 일을 계속하게 된다. 멈추지 않으면 여유가 만들어지지 않고 여유가 없으면 주변을 둘러보지 못한다. 언제나 가장 익숙한 풍경과 일 그리고 자극 속에서 매몰되어 버리는 것을 그만 하기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너무 고통스럽고 힘들더라도 하지 않는 것은 분명 나의 의지로 결정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것은 분명히 이성의 영역이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속에서 주인공들이 서로 다른 성향으로 갈등했던 것은 어렴풋이 기억한다. 내 속에서 지금 그런 내전이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나는 나의 주도권 없음으로 인해 정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실감하고 있다. 나는 나와 타협하고 나와 협력해야 한다. 그리고 주도권 없는 비루한 지금의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할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냥 하루하루 요령을 잘 찾아나가 보는 수밖에는 다른 방도가 또 있을까? 삶의 많은 부분은 결국 시행착오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내가 지금껏 싸워온 모든 것들과 화해하기 위해서 나 자신의 가벼움을 받아들이고 ‘그럼에도’ 그 약하고 허약한 자아를 바탕으로 주체성을 회복해야 한다. 그 과정이 내 앞에 정말 길게 늘어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도 지금이 여름인 것이 참 다행이다. 난 여름 아이라서 그런지 여름에는 잘 회복하는 편이니 말이다. 너무 우울하지 않게 화창하게 빛나는 여름이 계속 중이라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다. 조바심을 내지 말자. 지금은 그것이 제일 위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