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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터피터 Jul 31. 2021

질문

괴리

아이일 때는 항상 무엇인가 궁금하다. 그래서 ‘왜?’라는 질문을 많이 하게 되고 어른들은 그런 아이의 모습을 때론 대견하게 때론 귀찮게 생각하면서 반응한다. 어릴 때는 한두 번의 ‘왜?’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질문이 이어지는 경우도 있고 그럴 땐 대답하는 어른도 당혹스러워진다.


아이의 질문은 세상에 대한 탐색이다. 그것은 자극에 대한 반응이면서 또한 내적 불안이다. 어른들이 아이의 질문에 반드시 대답을 해주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아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이가 하늘이 왜 파란지 물어본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답을 찾아서 가르쳐 줄 것인가? 우리는 대부분 그렇게 한다. 하지만 아이에게 왜 파란 것 같은데? 넌 어떻게 생각해?라고 다시 한번 물어볼 수도 있다.


보통의 아이들은 어른이 빨리 답을 알려주기를 바란다. 그것은 자기도 모르는 내적 불안을 가라앉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말에 정말 곰곰이 자기 생각에 빠져든다면 그것은 그 아이가 세상을 탐구하는 자극에 빠져서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다는 말이 된다. 아이의 답이 무엇이든 상관없다. 그 아이가 자기 생각을 가지고 사고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그런 사고하고, 상상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아이들이 있다. 어른들이 빨리빨리 답을 말해주면서 사고하는 재미를 깨닫지 못한 채 세상에 대한 탐색에 즉각적인 해석을 얻지 못하면 내적 불안을 느끼게 되는 그런 아이들이 있다.


모든 것에 빠르게 반응하는 것에 길들여지는 아이들은 사고하는 것을 겁을 내기 시작한다. 그래서 모든 것들을 어른에게 의존하고 끝없이 질문을 하면서 자신들의 내적 불안을 잠재우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어른과의 반응 관계에서 재미를 느끼고 질문하는 것에 집착하게 된다. 자기 생각을 하기보다 자기 질문에 즉각적인 반응이 돌아오는 것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그런 아이들은 어른이 하는 대답 자체에는 큰 흥미가 없는 경우도 많이 있다.


하지만 아이들 중에는 그렇게 얻은 정보를 이용해서 자기만의 세계관을 만들고 그 안에서 공상의 세계에 빠져드는 아이들이 있다. 그렇게 하다 어느 순간 어른들이 알려준 정보와 자신이 만들어낸 생각이 충돌하는 지점이 발생하고 그런 경험을 한 아이는 이번에는 좀 더 진지하게 어른에게 정말 엉뚱해 보이는 질문들을 할 때가 있다. 그것은 많은 경우 아이들이 언어에 대한 개념과 명칭 그리고 추상적인 관념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불가능하기 때문 일어나는 문제이지만 어른의 눈에는 그냥 아이의 질문 자체가 이상하게 느껴져서 대충 무시하거나 자기 역시 엉뚱한 답을 해주거나 심지어 그런 아이를 나무라기도 한다.


그럼 그 지점에서 아이는 뭔가 이상함을 감지하기 시작하지만 그게 뭔지는 모른다. 어른과 아이의 신뢰관계는 그래서 중요하다. 아이가 믿고 애착하는 어른이 아이에게 거짓말을 하기 시작하고 뭔가 강압적인 복종을 요구하면서 아이가 그것을 납득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기 시작하면 아이는 그 상황에서 발생한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자신만의 돌파구를 어른 몰래 도모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아이와 어른은 대립 관계가 성립되고 어른이 아이의 잘못을 지적하면 아이들은 혼나는 것이 두려워 그 과정에서 내적 죄책감과 반항심을 동시에 품게 된다.


뭔가 납득하지 못할 괴리가 느껴지는데 아이들은 그것을 어른에게 설명해서 풀어낼 능력이 없다. 그럼 아이의 내적 체계와 세계관에서 왜곡이 발생한다. 그리고 그렇게 생겨난 왜곡은 자라나면서 점점 커지고 어느 시점에는 본인 자신이 그것이 이상하다는 것을 자각하는 시점이 온다. 만일 그 이상한 점을 스스로 발견하고 수정할 수 있는 내적 능력이 있는 아이라면 그 아이는 앞으로도 건강하게 자라날 것이다. 하지만 그 이상 상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아이는 결국 자기 내부보다는 외부로 눈을 돌려서 더 강한 자극을 찾아 집중하고 밖에서 보상을 얻어 내부의 문제를 계속 무시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이 만성이 되면 어느 순간 속에서 뭔가 울컥울컥 하고 속이 갈리는 듯한 반응이 올 수도 있고 세상의 모든 일에 적의를 품을 수도 있으며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부정적이 되어 대단히 염세적이거나 무기력하게 생활하게 되는 회의주의가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런 단계를 거쳐서 아마 지금의 나의 내면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나 스스로가 그토록 힘들어했었던 것 같다. 즉 어른들과 커뮤니케이션이 순조롭지 않았고 나 스스로도 자기 자신을 잘 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지난 일은 이미 지난 일. 지금은 내 앞에 있는 현재에 집중해야 할 때다. 문제를 풀기 위해 현재를 보고 나의 내면을 보고 글을 쓰고 이해하고 조금씩 바꾸어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 내가 직면한 현실이다. 조급해한다고 달라질 건 없다. 문제를 그냥 직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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