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해석
자극에 의한 쾌락, 고통에 의한 아픔.
난 무언가에 아주 쉽게 중독된다. 호기심이 많은 이유일 수도 있지만 요즘은 원래 겁 많은 성격에 의해 불안이 너무 커지면서 그것을 무마하기 위한 방편으로 자극에 쉽게 끌려가는 기질이 더 강해졌다는 느낌이 든다. 자극에 온통 정신이 쏠려있는 동안에는 아니면 틀에 박힌 일상의 효율에 완전히 매몰되어 있는 순간에는 난 불안에서 잠시 자유로울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일상과 패턴이 계속될수록 내 안쪽에서는 뭔가 모를 공허가 점점 커져간다.
그리고 그런 공허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타나는 감정이 완벽주의에 대한 집착인 것 같다. 세상에 완벽이란 없다. 완벽이란 사실은 어느 정도에서 만족할 것인가에 대한 기준치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물을 맨눈으로 볼 것인가, 돋보기로 볼 것인가, 아니면 현미경으로 볼 것인가에 따라서 완벽의 기준은 전혀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내 시각으로 볼 때 불안과 공허감이 점점 커져갈수록 그것에서 자기 방어를 하기 위한 기준은 점점 더 높아질 수밖에 없고 결국에는 그 모든 과정이 자기 파괴와 자기 착취 그리고 자기학대로 이어지는 것 같다.
그럼 결국 어느 과정에서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신호로 내적 아픔을 느끼기 시작한다. 몸이 약한 사람이라면 정신보다 몸이 먼저 망가져서 신호를 보내올 수도 있다. 나는 소화기 계통이 약해서 항상 위염과 장염을 달고 살았는데 그게 너무 자주 발생하고 항상 병명에 ‘신경성 위염, 신경성 장염’이라는 말이 달려 있어서 언제부터인가는 이 병들을 그냥 신경 쓰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낫는 병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내 몸과 마음이 보내오는 신호에 무관심해지면서 나는 그냥 일상의 자극들에 더 집착하고 그것들에 휘둘리고 있었다.
이 악순환은 너무 오래전에 시작되었고 ‘생존’을 위해 생계를 신경 써야 하는 보통의 현대인으로서 나는 막연하게 커져 가는 내적 불안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지금도 나는 모든 것들의 윤곽을 제대로 파악한 것은 아니다. 단지 내가 인식하고 있는 나의 정체성과 기질 그리고 나의 특성들이 정말 내가 알고 있는 대로 작동하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나의 감정과 욕망이라는 것이 정말 내가 깊이 원해서 만들어지고 생겨나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외부 자극에 대한 단순 반응일 뿐인데 그것에 지나치게 예민하게 대처하면서 여러 오해와 악순환의 고리를 내가 더욱 강화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 계속 살펴보고 있을 뿐이다.
어찌 되었든 난 불안이 발달하면서 그 밖의 감정들도 덩달아 발달한 것 같다. 그래서 이성만으로 나를 컨트롤하는 것이 정말 힘이 든다. 무슨 일을 하든 감정이 적절히 받침이 되어주면서 흥을 북돋우지 않으면 나는 꾸준하게 무엇을 지속하는 것이 대단히 어렵다. 그래서 나의 감정을 너무 억누르지 않고 또 그것에 휘둘리지도 않으면서 중심을 잡는 연습을 계속해나가야 한다. 그것을 알고 있지만 감정의 기복은 기본적으로 호르몬 작용이기 때문에 아직도 나는 그 화학작용의 폭발력을 온전히 감당할 내공이 많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착 가라앉은 기분으로 글을 쓸 때는 한 글자, 한 글자 덧붙이는 것이 마치 퉁퉁부은 목으로 억지로 음식물을 넘기는 것 같은 곤혹스러운 기분을 야기시킨다.
이 상태도 분명 나의 한 부분이다. 그리고 신이 나서 붕 떠있는 상태도 나의 한 부분이다. 이 양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중심 잡힌 나를 찾아가는 것이 나의 긴 여정의 종착지가 되지 않을까? 아픔을 느낀다는 것은 삶의 밸런스가 좋지 않다는 경고음이다. 나의 인식이 한쪽으로만 치우쳐져서 균형감을 잃어가고 있다는 신호이고 그래서 자기 자신을 다시금 잘 살피고 이해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는 무의식의 외침이다. 그 신호를 받아들여 나 자신을 새롭게 해체하고 이해하기 위해 요즘은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렇지만 여전히 살아온 삶에 의해 기본적으로 나를 추동하는 관성이 너무 강하다. 그래서 기우뚱거리고 비틀거리고 조금 울렁거린다.
나에게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는 어렴풋하게 알 것도 같다. 하지만 그것들에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나의 감정을 어떻게 내 소중한 사람들에게 있는 그대로 잘 전달할 수 있을지, 아직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꽤 많은 시간을 살아왔지만 그 시간들 모두를 나답게 산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의 말과 나의 행동 그리고 나의 글들에 나다움이 흠씬 묻어나지 않아서 나를 올바르게 표현하는 것이 너무 서툴다. 나의 유한한 에너지와 시간을 내가 진짜 원하는 것들에만 쏟아도 한참이나 모자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손해보지 않기 위해 소극적으로 살아온 나의 삶이 자꾸 그 에너지와 시간을 엉뚱한 것에 골몰하도록 만든다.
난 꽤 뚜렷한 주관과 취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괜히 남들에게 날카롭게 보이기 싫어서 나의 주관을 뚜렷하게 내보이는 것은 주저했다. 무엇을 선택하면서도 항상 주변의 분위기에 맞추어 ‘통일성’을 쫓아갔고 그러다 보니 ‘아무거나’라는 이상한 선택지를 나의 무던함 또는 사교성으로 왜곡하여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그건 그냥 어떤 선택에 전적인 책임을 지기 싫은 회피성 자기 방어의 발로가 아니었을까? 자기의 취향을 전적으로 따라가다 보면 더 많은 실패를 직면해야 한다. 남들을 따라가고 괜히 아는척하며 나서지 않으면 중간은 갈 수 있다. 그것도 나름의 삶의 기술이며 요령일 수는 있다. 하지만 나의 기질이 그렇게 무던한 삶을 사는 것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평범한 것인가?
행복한 척하며 그냥 평범하게 지내는 것과 진짜 행복한 것은 다르다. 나의 본모습을 찾아서 그것을 드러내는 것에 익숙해지지 않고 어떻게 진짜 행복을 잠시라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을까? 웃고 미소 짓는 내 모습 속에서도 뭔가 허전하고 공허한 것을 계속 느끼고 내적으로 아프다고 느꼈다면 계속 자기 대화를 지속하고 더 깊이 자기 안을 들여다봐야 한다. 아직 나는 나를 잘 모른다. 너무 오랜 시간 평범해지기 위해 너무 무리했다. 요즘 문득문득 느껴지는 아픔은 그 지난 시간에 대한 반동이다.
너무 올바르고 착하고 예쁜 것에 집착하지 말자. 그게 나의 본모습은 아닐 것이다. 나의 본모습은 보다 추하고 난폭하고 사나운 어떤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나의 본모습이라고 할지라도 나는 그것을 다스려서 남들에게 상처 주지 않고 살아갈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니 너무 내 본모습이 추할까 걱정하며 나를 학대하는 것은 그만두자. 좀 더 진실된 나를 만나기 위해 좀 더 느슨해져 보자. 힘을 빼보자. 숨을 깊게 들이 셔보자. 지금은 아픔을 느낄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