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아홉째 날, 화산 국립공원
내면 깊은 곳에서 흐르는 슬픔 분노 절망의 연결고리. 그 '불의 고리'와 같은 상처받은 약한 부분을 누군가가 압박해 오면 나도 모르게 버럭 터져 버릴 때가 있다. 그 사람도 아마 의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저 자신도 모르게 원인 모를 선을 밟고 서서 갑작스러운 반응에 놀라거나 혹은 경미한 화상을 입는다.
정작 내부 압력을 조절하지 못하고 터져버린 끓는 분노는 항상 더 뜨겁게 나를 덮친다. 표피 진피 뼈 내면. 어딘가에 지울 수 없는 상흔을 스스로 남긴다. 그 흉터와 균열들은 쌓이고 쌓여 나의 안과 겉은 거칠고 흉악하며 위험하다. 여전히 나의 내면 깊이 마그마가 흐르고 있다. 가끔씩 뜨끈한 김을 쒸익쒸익 뿜어내면서.
하와이 화산 국립공원 분화구, 킬라우에아 이키 트레일(Kilauea Iki Trail)을 걷는다. 회색 잿빛 구덩이, 찢어진 대지, 마그마가 남기고 간 흉터를 걷는다. 한참 걷는다. 어디 한 곳 상하지 않은 구석을 찾을 수 없다. 그럼에도 이곳에 생명이 자라고 있다. 갈라진 대지의 틈새로 연녹색 잎들이 동글동글한 다홍색 열매를 달고 자라고 있다.
검은 모래와 같은 이 땅에 자리 잡은 한 포기 누런 잡초마저 반갑다. 이곳은 죽은 땅이 아님을 증명한다. 단단한 암석의 균열을 비집고 꽤 자라 오른 나무뿌리 위를 연한 겨자색 레이스 같은 여리고 섬세한 식물이 마치 수중 바위를 덮고 있는 산호초와 같이 소복하게 장식한다. 선명한 붉은 작은 열매를 터트리고 나온 꽃 잎은 선홍색 촉수들을 모아놓은 듯 강렬한 생명력을 뿜는다.
화산지대. 언제고 폭발할 화산이 터져 펄펄 끓는 검붉은 용암이 속절없이 흘러내려 폐허가 되었다. 섬세하고 푸르른 생명력을 잃고 굳어버린 무채색 공간에 시간이 지나 이제는 화산 분화의 선물이 깃들어있다. 하늘이 쏟는 검은 눈물들이 찢어진 대지 사이로 흐르고 흘러 타고 남은 화산재의 영양분과 융합하여 신비한 새로운 생명을 창조한다. 태양이 떠오르고 안개가 피어오르는 그 속으로 더 깊이 걸어 들어간다.
원초적인 환태평양 조산대. 이곳의 신성한 상흔과 비교할 수 없지만 흉악망측한 내 안의 상처를 내 마음을 걷는다. 초라하지만 왠지 애틋하다. 어쩌면 내가 부러워해온 보통의 평안한 삶을 살아온 이들에게는 없을 나만의 무늬를 찾은 듯 끌어안는다. 용서받는 것 같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불의 고리'에 창조된 나 그리고 내 소중한 아이들.
나 자신보다 더 소중한 내 아이들의 여리고 고운 그 피부에 화산의 마녀처럼 끔찍한 화력을 퍼부어 깊은 화상을 입히기도 했다. 때론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냄비의 김에도 혹여나 데었을까 마음을 조이기도 했다. 나의 부모가 할퀴고 간 상처를 이기지 못하고 내 아이들에게 대물림하는 내가 많이 싫었다. 내가 엄마라서 미안했다. 여기서 이제 나를 용서해주고 싶다.
이 분화구도 나도 나의 아이들도 우리 모두 애초에 안전지대에 뿌리내지리 못한 존재인 것을 어찌하나. 고귀하고 아름다운 구슬픈 음을 따라 성스러운 상처투성이 길을 걷는다. 하늘에서 보슬비가 내린다. 더 이상 검지 않은 눈물이 떨어진다. 늙고 부석한 피부에 촉촉하게 내려앉는다. 희뿌옇게 내려앉은 안개가 메마른 내 안 깊숙이 적셔준다. 깊숙한 내 안의 잔불이 연소된 듯 하얀 연기가 올라온다.
단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천진한 자연이 맑고 즐거운 장조의 화음으로 노래하는 것과는 또 다른 깊이의 슬픈 단조의 선율이 잔잔하게 흐른다. 그 선율이 파도치는 암석의 문양이 된다. 깊고 높은 균열에 맞추어 아름답게 지층이 생긴다. 저기 태양아래 회색 잿빛 상처 입은 대지위 당당하게 서있는 내 아이들이 찬란하다. 존재만으로 빛 난다. "오 창조주에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