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여덟째 날, 빅 아이랜드 마우나케아
아빠는 어린 나의 손을 잡고 산으로 바다로 많이 다녔다. 모두 흐린 한 기억들이다. 하지만 어딘가의 낚시터 혹은 캠핑장에서 아빠와 마시던 코코아의 기억은 여전히 따듯하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라 얼굴을 촉촉하게 적셔주던 캠핑용 브론즈 컵의 온기를 손이 기억한다. 달콤한 초코향이 아직도 코끝에 달려있다. 아빠의 사랑 가득한 눈빛이 내 눈 안에 잔상으로 남아있다.
하늘에서 쏟아질 것 같은 별들이 내 감각에 새겨져 있다. 그래서인지 항상 별에 대한 그리움이 있다. 어쩌면 별이 아닌 아빠에 대한 그리움인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그리스 신화와 별자리를 마스터하고 별을 쫓아 산으로 바다로 다녀보고 싶다. 은퇴 후엔 RV를 타고 미국 전역의 모든 내셔널파크에 가보고 싶다.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 아래에서 캠핑 락킹체어에 앉아 우쿠렐레를 튕기며 핫 코코아를 마시고 싶다.
빅아이랜드에서 뭐가 꼭 하고 싶냐는 남동생에게 주저 없이 은하수와 화산 그리고 뜨고 지는 태양을 꼽았다. 원 없이 구경하라며 별 구경하기 좋은 숙소를 첫날 잡아주었다. 하늘과 가깝고 바다가 눈앞에 펼쳐진 전망 좋은 곳에서 편안하게 밤하늘을 바라보다 떨어지는 별똥별을 보라고. 이른 아침에 바다를 향해 나있는 창문을 열고 해돋이를 보라고 마음 써서 고른 숙소였다.
하지만 어제 스노클링 해프닝 후유증으로 모두 놓쳤다. 어젯밤 유성을 세 개나 보았다는 이웃의 말에 더 속이 상한다. 모두 이른 아침부터 나가고 혼자 남아 하늘과의 경계가 모호한 바다를 바라본다. 숙소에서 바다까지 경사면은 커피 밭이다. 길가에는 아보카도와 하와이 로컬 과실들이 아이 머리만 하게 달려있다. 직접 따서 먹는 맛도 좋겠지만 눈으로 따먹는 열매맛은 실패가 없다.
어제 마우이에서 하와이주 역사상 가장 큰 산불이 났다. 많은 사상자가 난 그 화재 여파로 빅아일랜드의 하늘과 바다도 맑지 못하고 우울하다. 우리의 원래 예정지는 바로 그곳 마우이 라하이나였다. 마우이에서 피어오르는 작은 연기를 나는 비행기에서 보며 지나왔다. 나의 고집으로 마지막에 변경된 계획이었다. 뉴스 속의 대피소의 사람들이 남의 일 같지 않다. 마음이 무겁다. 한편으론 보호받지 못하고 살아온 것 같은 내 삶이 그렇지만은 않았다는 이기적인 생각도 든다
어려서부터 세상 어디에도 날 보호해 줄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다. 신의 것과 같은 무한한 사랑을 주던 아빠도 가정불화에서 날 지켜주지 못했다. 나의 엄마로 살겠다던 엄마도 일정기간이 지나자 나를 떠났다. 엄마 아빠가 이혼한 그때부터 내 삶에 확연한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점점 더 짙어져 암흑으로 변했다. 그 어두운 밤에 지치지도 않는 불안이 계속됐다.
칠흑 같은 밤, 하늘의 북극성을 발견한 듯 결혼을 하고 양자리, 염소자리, 쌍둥이자리 별들을 낳았다. 그럼에도 어둠은 가시지 않았고 여전히 암전상태였다. 그 속에서 넘어져 까지기도 하고 부딪혀 깨지긴 했지만 매번 혼자 일어날 수 있었다. 신기하게도 초등학교 때부터 사회면을 장식할 만한 커다란 사건 사고 현장을 찰나의 순간으로 잘 피해 왔다. 오늘도 이렇게 여기에 앉아 바다를 본다. 한때는 그런 위기를 모면하는 나의 질긴 생명이 싫었다.
차라리 빨리 죽고 싶었다. 살을 에이는 바람 추위 어둠이 정말 싫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길을 더듬더듬 맹인처럼 지팡이를 휘저으며 더 이상 가고 싶지 않았다. 깜깜함이 외로웠다. 생각해 보면 어둡기만 했던 건 아닌 것 같다. 나의 비포장 오솔길에는 빛과 같은 무엇인가 항상 함께했던 것 같다. 반딧불이가 꼬리에 노오란 빛을 깜빡이며 날고 있었고, 희미한 작은 별들이 멀리 어디엔가 분명히 있었다. 그리고 나의 양자리, 염소자리, 쌍둥이자리 별들이 플래시라이트처럼 내 발을 비추고 있었다.
저녁, 하와이 제도 중 가장 높은 마우나이 케이 산으로 향한다. 사천 미터의 정상에 위치한 천문대는 가지 못하고, 삼천 미터 높이의 비지터 센터로 향한다. 마우이 섬 화재와 허리케인으로 어쩌면 하늘을 수놓은 별과 환상적이라는 일몰은 물론이며 아름다운 마우나이케이 산능선조차 식별이 불가능할까 걱정했었다. 하지만 가까이 갈수록 어두운 구름이 걷히고 하늘이 보이기 시작한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 속으로 들어온 듯한 풍경이 펼쳐진다. 그 속으로 안개 같은 구름 속으로 치달려 산으로 올라간다. 높이를 가늠할 수 없는 산봉우리들에 둘러싸여 구름이 휘감고 있는 산을 내려다본다.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작품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 Wanderer above the Sea of Fog)의 방랑자가 된듯하다. 저 아래 헤드라이트를 켜고 올라오는 줄지은 차들이 일렬로 행진하는 개미와 같다.
하와이 인들의 신성한 화산 위에서 바라보는 인류 문명은 너무도 하찮다. 허리케인으로 유난히 매섭게 부는 차딘 찬 바람에 불어와 정신을 맑게 깨운다. 태양이 떨어진다. 땅과 하늘이 마지막 타들어가는 화려한 빛을 내면 어두워진다. 숨어있던 별들이 조금씩 자취를 들어낸다. 반짝인다. 은하수, 셀 수 없는 많은 별들이 머리 위로 쏟아질 듯 빛난다.
삶을 축복한다. 별똥별이 떨어진다. 나의 양자리, 염소자리, 쌍둥이자리 별들이 환호하며 눈이 부시게 반짝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