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s Lisa Oct 21. 2023

끝까지 가보지 못했으면서

하와이 보름째, 코코 헤드 트레일

여행의 마지막 날, 밤하늘의 별 빛 외에는 의지할 것이 없는 칠흑같이 깜깜한 새벽, 다행히 넓은 주차장에 주차한다. 입구 삼거리에서 표지하나 찾지 못하고 갈 길을 잃는다. 다행히 카트를 타고 출근하는 관리자를 만난다. 저 앞 반짝이는 작은 별빛 같은 누군가의 등산헤드램프를 가리킨다. "저 빛을 따라가. 너 물 가져왔니?" 아저씨가 알려주신 방향으로 더듬어 가니 계단이 시작된다. 얼마 전 급경사 트레일 밧줄 붙잡고 하이킹도 했는데, 계단까지 설치되어 있다니 까짓것 만만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눈앞의 계단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산 정상 벙커까지 군사 물자를 나르기 위해 만든 철도였다. 보통 사람의 발폭으로 한 번에 오르기도 반칸씩 오르기도 애매하다. 어정쩡한 간격의 계단이다. 한 칸 한 칸 어린아이처럼 디뎌보기도 하고 '하나 둘', '하나 둘' 다리 벌려 몸을 튕기듯 올라도 가 본다. “하아~” 깊은 한숨이 나온다. 1048개의 계단, 몇 개 오르지도 않았는데 벌써 지친다. 


어둠이 더 짙어진다. 깜깜해진다. 시작부터 이러면 곤란하다는 아이들에 둘러싸여 어제 탄 집라인 핑계를 대본다. "얘들아 우리 이제 반쯤 올라왔니? 지금 몇 시니?" 아직도 멀었다는 아이들에게 묻고 또 묻는다. 더 이상 묻지 말라는 대답이 돌아와도 또 묻는다.


어둠이 서서히 걷혀온다. 지친 몸을 돌려 얼마나 많이 올라왔나 돌아본다. 생각보다 급한 경사에 현기증이 난다. 몸이 휘청거린다. 계단에 그대로 주져 앉는다. 1/4 정도 올라온 계단, 올라가기도 내려가기도 무서워 꼼짝을 못 한다. 아니 서서 걸어 올라가기는커녕 계단에 그냥 앉아있는 것도 어지럽다. 아이들의 눈치를 보며 몸을 낮추고 계단 나무를 붙잡고 오른다. 


세월만큼 낙후된 철도의 바닥 지지대가 무너져 발을 헛디디면 추락한다는 빨간 경고판이 나온다. 이쯤 되니 포기하고 싶어 진다. 그냥 철도옆 평평한 작은 공간에 의탁하여 아이들을 기다리고 싶어 진다. "먼저들 올라가. 나 여기서 기다릴게"


평소에 가장 말 안 듣고 엄마생각 눈곱만큼도 안 해주는 둘째가 나선다. 엄마를 여기 혼자 두고 갈 수 없다며 단호하게 나온다. 같이 오르던 여기서 같이 내려가던 둘 중 선택하라니, 원수가 따로 없다. 혹시라도 산꼭대기에서 저번 같은 일이 발생하면, 이번엔 삼촌도 못 오고 앰뷸런스가 아니라 헬리콥터를 불러야 한다 설득해 보지만 소용없다. 


뭘 어쩌겠다는 건지 자기들이 책임지겠다며 독촉한다. 다시 기어올라간다. 눈물이 난다. 땅바딱 잡고 올라오며 흙 묻은 더러워진 손으로 눈물을 닦는다. "제발 먼저 올라가! 내가 천천히 따라가던 기다리던 할게!" 결국 폭발한다.


그래도 눈치 있는 큰애가 동생들을 데리고 먼저 올라간다. 금세 올라갔다 내려오겠다면서. 내려다 보기도 아찔한 저 아래에 사람들이 하나 둘 나타난다. 쉽게 잘 오르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처럼 헉헉대는 사람 주저앉은 사람들도 보인다. 어지러워 똑바로 보지도 못하고 옆으로 쳐다보며 생각한다. 


이미 꽤 올라온 이 시점에서 포기해야 하는가. 애들 보기 부끄럽지 않은가. 어둠 속에서는 힘들긴 했지만 무섭지는 않았는데 왜 이러는가. 왜 계속 오르지 못하는가? 사실 올라가는 것보다 이젠 내려가는 것이 더 두렵다. 아직 오르지도 못했으면서.


가정 형편을 걱정해 스스로 포기했던 사립대 진학 세 아이들을 키우며 혹시나 하는 쓸데없는 근심 걱정으로 잡지 못했던 기회들이 떠오른다. 그렇게 이룬 것 없이 늙고 약해진 나 자신이 수치스러워 울었던 시간들도 따라온다. 그럼에도 여전히 두려워 주저앉아 있는 나 자신을 마주한다. 


저만치에서 얼굴이 터질 것처럼 벌게진 얼굴의 두 청년이 거친 호흡을 하며 털썩 앉는다. 왠지 위로가 된다. 한 친구가 다시 일어나 걷기 시작한다. 갑자기 아이들이 나 때문에 오르는 해만 잠깐 보고 그냥 내려오면 어떡하나 걱정이 몰려온다. "이 순간이 영원히 반복돼도 좋은가?" 내 안에서 물어온다.


"남들은 500불도 넘게 돈 주고 하는 헬리콥터 관광, 까짓것 나도 헬리콥터 타지 뭐" 혼자 중얼거리며 일어난다. 저 애틀랜타에서 왔다는 얼굴 벌건 두 친구들 보다는 먼저 올라가야겠다 결심한다. 더 이상 뒤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내가 밝아야 할 딱 하나의 계단에만 집중하며 네발로 포복하듯 기어오른다. 


1,048 계단 끝 벙커 앞에 도착한다. 온몸에 흙번지를 뒤집어쓰고 눈물자국이 마른 꼬질한 얼굴로. 계단 중간쯤에서 만났던 매일 3-5번 계단을 오르내린다는 할머니가 반갑게 맞아준다. "오~ 너 그래도 올라왔구나! 그런데 오늘은 구름이 많아. 해돋이는 못 보겠어. 내일 다시 올라와!"


벙커를 돌아 정상에 가니 매서운 바람이 세차게 불어온다. 아이들이 정상에서 혼이 빠진듯한 황홀한 얼굴로 경치를 보다 나를 발견하고 손 흔든다. 저 아래 두고 온 나를 잊은 지 오래인 듯한다. 괜한 걱정을 했나 보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등반한 내게 선물을 주듯 동쪽하늘에서 구름이 겉이며 불처럼 타오르는 듯한 해가 승천한다. 동시에 완전한 쌍 무지개가 남쪽 하늘을 가득 채운다. 하늘과 가까운 이곳에서 태양 바람 구름 무지개 신이 함께 하는 것 같다. 영화에서도 보지 못한 신비한 자연을 목도한다. 


여행의 마지막 날, 아이들과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만든다. 아이들이 오늘의 나를 자랑스럽게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 후회 없는 날이다.


이제 내려갈 시간이다. 근데 다리가 풀려 후들거린다. 똑바로 서있기도 힘들다. 차분한 셋째에 기대어 조심조심 내려온다. 이미 내 다리가 아니다. 쓰러지듯 앉을 때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물어온다. "너 물 가져왔니?" "너 물 가져왔니?" "너 물 가져왔니?"... 한국 같으면 알사탕이라도 하나 줄텐데 다들 물타령만 한다. 


소방수 경찰 혹은 군인 같은 포스의 아저씨가 계단옆 바위에 널브러져 있는 내게 다가온다. "물 있습니까? 당뇨 혹은 지병 있습니까?" 아이들이 대답한다. 구호를 외치듯이 이젠 박자 맞춰 복창한다. "엄마 당뇨도 지병도 없습니다. 복용하는 약도 없습니다. 물 충분합니다. 괜찮습니다. 단지 다리가 풀렸을 뿐입니다. 우리가 알아서 잘 모시고 내려갈 수 있습니다!"


결국 큰 아들 등에 업혀 내려온다. 집을 나서기 전에, 죽을 듯이 아프다 엄살 부리는 아들 등에 알로에를 발라주며 참을성 없다 이런 정신력으로 뭘 하겠냐 잔소리했는데 무안함에 고개를 숙이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속삭인다. "집에 가면 운동 열심히 할게. 비타민도 잘 챙겨 먹고, 건강에 신경 쓸게" 말없이 묵묵히 계단을 내려가는 큰아들이 듬직하다. 


작은 아이들이 내 가방 큰애 가방을 들고 양 옆을 지킨다. 나를 구조하듯 가뿐히 업고 내려가는 형을 존경하는 듯하다. 사실 노모를 업고 내려가는 중년의 아들이었다면 남들 보기 좋았을 것이다. 아니면 사랑하는 아리따운 애인을 업고 사랑을 속삭이는 젊은 남자였어도 그림이 좋았겠다. 하지만 우리는 이도 저도 아닌 모양새로 사람들의 의문스러운 눈빛을 받는다.


드디어 마지막 계단에 도착한다. 안도한다. 그런데 큰아들이 나를 내려놓지 않고 갑자기 높이 추켜 업고 달린다. 사나운 야생마가 등에 올라탄 사람을 떨구려는 듯 두발 높이 들고 날뛰듯이 요란스럽게 달린다. 날 던지듯 추키면서 뛴다. 지나가던 관리인도 놀란 눈으로 입을 다물지 못하고 쳐다본다. 


일광화상 당한 목과 등이 따가워 더는 못 참겠다면 180센티가 넘는 애가 펄쩍펄쩍 날뛴다. 사람들이 경악하듯 쳐다보는 것 같다. 모르긴 몰라도 작은 애들도 더 이상 형을 우러러보지 않는 것 같다. 뒤에서 둘째가 큰소리로 웃다 못해 숨이 멎는 듯 꺼억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아마도 셋째는 조용히 형을 비웃고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 큰애에게 차열쇠를 빼앗기고 옆자리에 앉아 창밖을 내다본다. 아이들은 오늘을 어떻게 기억할까?


이전 18화 지나온 길을 다시 돌아본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