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logue (에필로그)
6 AM 알람을 울린다. 시차 적응이 힘들다. 5시부터 울리는 아침 알람을 5:30, 5:45, 5:50 늦추며 여전히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한다. 6시간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물리적인 시차가 아닌 정신적인 시간의 개념을 제자리로 돌리지 못하는 것 같다. 하와이의 급하지고 정확하지도 않은 느슨한 아일랜드 타임(island time)에 그대로 머물러 있고 싶다.
내가 기존에 생각하던 아일랜드 타임과는 다르다. 시에스타(Siesta)처럼. 매력적인 그림 속 유럽 귀족 여인들이 불면의 밤을 보낸 오후의 사치스러운 낮잠의 이미지였던 시에스타는 이탈리아의 가난한 섬 시칠리아를 여행하며 현실에서는 가혹하리만큼 높고 뜨거운 지중해의 오후 태양을 피해 이른 새벽부터 부지런히 고되게 노동한 이들이 처연한 단잠이라 여기게 되었다.
아이랜드 타임은 홈리스(homeless)에게도 지상낙원 같은 하와이에서 자연이 제공하는 풍요로운 과수를 누리는 이들의 여유로움이었다. 하지만 여행을 통해 그들의 마음을 엿본 것 같다. 위대한 자연의 폭력과 같은 지진 화산 쓰나미가 도사리고 있는 바다 한 중간 고립된 섬사람들의 애환을 들여다보게 됐다. 위대한 자연에 대한 자조적인 순응과 긍정의 시간으로 다시 이해한다. 고뇌와 번뇌로부터 해방된 이들의 아이랜드 타임, 그 속에 나도 계속 함께하고 싶다.
오랫동안 아빠에 대한 기억을 꺼내지 못했다. 깊은 심연 속에 갇아놓았다. 엄마가 자신의 불행에 대한 책임을 내게 책임 지우듯 나 역시 내 상실의 원인을 엄마에게 묻고 있었던 것 같다. 나 역시 원망의 대상이 필요한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아빠와의 추억이 있는 바다낚시에서 만난 남편을 게티 뮤지엄(J. Paul Getty Museum)에서 다시 만났다. 나를 발견하고 환하게 웃으며 다가오던 남편이 아빠와 오버랩되어 환승하듯 그와 연애하고 결혼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에게서 아빠를 체취를 찾고 있었던 것 같다. 나도 모르게 주체를 전복하고서. 나의 슬픔과 서러움의 이유를 남편에게서 찾으려 했던 것도 같다. 아빠와 끈이 완전히 끊긴 20여 년 전부터 내 애끓는 서러움의 근원을 모르고 애도하고 있었던 것 같다. 사랑의 상실이 견딜 수 없고 비참해서.
롤랑바르트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애도가 불러일으키는 완전한 새로운 삶 비타노바(vita nova)는 지금까지의 애도를 끝내기 위한 단절을 수행이라고 한다. 그에게 가능한 두 가지 길을 모순된다. 과거의 나를 뒤집어 자유로워지기, 단단해지기, 진실을 따라서 살기. 그리고 과거의 나를 더 강화하여 순응하고 편안함을 사랑하기.
무엇보다 애도하는 시간 동안 '과거의 나'라는 정념이 희미해졌는데 어떻게 뒤집고 강화할 수 있을까. 지나온 시간 동안 과거의 나도 현재의 나도 강력한 슬픔 속에서 변질되었는데. 결점 없이 태어나 내 팔에 안기어 대미지를 입으면서도 내 아이들이 성장하듯 나 역시 슬픔이 지속되는 와중에도 들쑥날쑥한 변곡점들을 그리며 변화했다. 비록 마이너스 점들이라 해도 모든 부정할 수 없는 나였고 앞으로 표시될 점들도 그럴 것이다.
난 여전히 하와이의 원주민들처럼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화산섬에 언제 땅이 갈라지고 언제 쓰나미가 밀려올지 모르는 불안의 섬에 부유하고 있다. 그저 이른 새벽 더 자유롭게 춤추고 노래하고, 견딜 수 없이 뜨거운 태양이 내리 쬐이는 그런 거부할 수 없는 날은 자연에 순응하여 깊은 잠에 빠져들 수뿐이 없지 않을까 싶다. 서늘해진 해질녘, 바다로 나와 오늘 하루 함께 수고한 이들과 시원한 맥주 한잔 하면서 농담을 나누고 웃을 수 있으면 그만일 듯싶다.
마흔, 인생의 지난날들을 돌아본다. 아픔도 많고 후회도 많았던 시간들을. 생각처럼 나쁘지많은 았았던 것 같다. 이제는 그런 시간들도 나의 수치스러운 순간들도 인정해보려 한다. 그래야 앞으로 다시 넘어져도 인정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지난날들을 정리하고 단절하는 비타노바가 아닌 그 시간들을 긍정하는 아일랜드 타임의 관념으로 남아 있는 나날들을 살아내고 싶다.
사탕수수공장 인부의 절단된 세 손가락에서 유래된 "괜찮아" "걱정할 거 없어""좋아" 모든 긍정의 손 인사말샤카(Shaka)를 나도 따라 해 본다. 중간 세 손가락 각지게 접고 엄지와 약지를 생동감 있게 핀다. 그 손을 어설프게 위로 치켜들지 않고 엣지 있게 살짝 아래로 까딱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