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붉은 지붕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희동 김작가 Apr 19. 2020

누가 내 딸기를 훔쳐 먹었을까

루팡과 셜록홈즈

어린 시절 나는 '소공녀'나 '소공자'대신 '괴도 루팡'과 '셜록홈즈'에게 열광했다. 위로 네 명이나 되는 오빠들의 독서 취향을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다.


요즘 뒤늦게 루팡과 셜록홈즈의 놀이에 빠져있다. 어떻게 해서든 루팡보다도 더 신출귀몰한 그놈을 꼭 밝혀 내고 말 것이다.


올봄엔 매년마다 찾아가던 근교의 화원에 가는 일도 몸을 사렸다. 화단에 데크를 설치한 뒤로는 꽃을 심을 터가 좁아진 이유도 있지만 코로나 19 때문이기도 하다.

봄이 되면 맨 먼저 각양각색의 꽃들이 있는 비닐하우스 화원에서 봄을 맞곤 하였다. 차를 타고 조금만 교외로 나가면 넓은 비닐하우스에서 겨우내 키운 꽃들이 꽃봉오리를 매달고 있다. 좀 더 이른 봄을 이곳에서 만끽하고 그해 심을 꽃들을 사서 자동차 뒷 트렁크에 싣고 오곤 하였다


동네 가까운 화원에서 몇 종류의 꽃을 사는 걸로 만족했다. 불과 몇 달 전에 우환에서 발생한 바이러스가 전 세계에 퍼졌듯이 모든 유행은 국경이 없다. 꽃도 유행에 민감하다. 같은 종류의 꽃이라도 색깔이 다르고 꽃송이의 모양이 매년 다르다.

그동안 홑겹으로만 피던 매발톱꽃이 장미처럼 겹꽃으로 개량되어 나왔고 손으로 쓰다듬으면  레몬향기가 풍기는 율마도 모양이 다양하다.

기존의 꽃보다는 새로운 꽃들에게 호감이 가는 것은 당연하다.


     온 동네를 밝게 꾸며주는 우리 동네 화원


그중에 내 눈길을 끈 것은 붉은 딸기꽃이었다. 기존의 하얀 딸기꽃만 보다가 붉은색의 꽃을 보니 같은 딸기 꽃이라도 달라 보였다. 딸기꽃 화분을 사서 질그릇에 옮겨 심고 옥상 장독대 위, 하루 종일 햇빛을 볼 수 있는 자리에 올려 두었다.

꽃이 피고 지더니 이내 딸기가 여럿 달렸다. 딸기가 익으면서 점점 붉은색을 띠고 나는 꽃을 보듯이 그것을 바라보았다. 딸기가 익으면 손녀가 직접 딸 수 있게 해야겠다.


하지만 딸기를 노리고 있는 놈이 따로 있는 줄 몰랐다. 아침에 딸기꽃을 보러 갔다가 잘 익은 딸기를 누가 갉아먹은 걸 보았다. 괴도 루팡과 셜록홈스를 읽으며 독서의 세계에 입문한 나는 그 주인공들의 매니아답게 천천히 주변부터 탐색했다.


딸기가 있는 옥상 항아리 근처에는 발자국이 없다. 범인은 매일 밤, 딸기 한 알을 야금야금 조금씩 갉아먹는다.

나는 놈을 추적해보기 시작했다. 맨 먼저 우리 집의 옥상을 무단출입할 수 있는 동물을 생각했다. 까치와 고양이 비둘기로 요약되었다.

비둘기와 까치는 갉아먹는다기 보다 쪼아 먹는 게 옳다. 쪼아 먹기와 갉아먹기는 남아있는 딸기의 상처에서 구분할 수 있다. 딸기는 뾰족한 부리가 아닌 조금 면적이 있는 앞이빨로 갉아먹은 흔적이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두 종류의 새는 야행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범인은 고양이로 집약되었다. 야행성과 이빨자국이 증거다 그런데 고양이에게 딸기는 한입거리도 되지 않는다. 그게 무슨 아껴먹을 간식거리라고 매일 밤 옥상에 까지 올라와서 아주 조금씩 야금야금 갉아먹고 갔겠는가, 범인이 고양이가 아니라고 생각하자 갑자기 두려움이 생겼다.


범인은 몸집이 작은 앞니를 가진 동물임에 틀림없다. 항아리 위에 늘어진 딸기를 허리를 굽히지 않고 먹을 수 있는 짐승은 쥐, 쥐밖에 없다.

와..,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머리카락이 송긋 섰다. 쥐라니..., 아닐 거야..., 서울 도심의 주택가에 쥐가 있다면, 말도 안 되는 상상이다. 범인이 고양이나 까치일 거라고 생각했을 때와 달리 쥐 같은 설치류가 아닐까에 생각이 미치자 꼭 확인을 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범인을 찾을 방도가 없다. 아무리 유능한 셜록홈스도 이쯤 되면 주인공 자리를 내놓아야 할 판이다.

                                                 발자국이 찍히겠지


범인은 어딘가에 증거를 남긴다. 루팡 같은 괴도도 푸른 장미를 증거로 남겨두지 않았던가 만약 증거가 없으면 남기도록 만들어야 한다.


나는 저녁에 딸기 화분이 있는 항아리 주변에 밀가루를 뿌려 두었다. 나름 과학적인 수사를 하고 있다.  바람이 불어서 밀가루가 날아가지만 않는다면 오늘 밤 놈은 족적을 남기게 될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옥상으로 올라갔다. 웬걸? 새벽부터 비가 뿌린 모양이다. 밀가루 위에 범인의 발자국 대신 봄비의 발자국이 찍혔다. 이곳저곳 살펴봐도 아무런 흔적이 없다. 범인은 비를 싫어한다? 또 하나 범인의 취향만 알게 되었다.

그런데 범인의 윤곽은 엉뚱한 곳에서 드러났다.

.

봄비는 하루 종일 내리고 있다.

비 오는 날에 모종을 옮겨 심으면 싱싱하게 자란다. 신선초 묘목을 몇 개 사서 심으려고 화원에 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신선초의 어린 순이 모두 잘려져 나갔다.  

꽃집 아줌마는 뒷산에서 내려온 담비의 짓이라고 한다. 네? 담비라고요? 놈은 매일 밤 이 화원으로 와서 연한 잎을 모조리 잘라먹는다고 한다. 청설모보다는 크고 너구리보다는 작았으니 담비가 분명하다고 했다.

순간. 우리 집 딸기를 훔쳐먹은 범인과 동일범이 아닌지 의심이 갔다.


인터넷에서 담비를 찾아 꽃집 주인에게 보여 주었다. 자신이 목격한 동물과 비슷하다고 한다.

범인이 담비라고? 담비든 너구리든 오소리든 쥐가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도심에 야생의 동물이 내려오는 것도 놀라운데 우리 집 밤손님이 담비라는 건 더욱 놀랄 일이다. 

그런데 담비가 범인이 아니라는 증거가 내 눈에 띄었다. 화원에는 우리 집보다 많은 빨간 꽃 딸기가 있는데 화원의 딸기는 그대로였다. 하마터면 억울하게 담비를 범인으로 몰뻔했다.


담비가 범인이 아니라는 증거는 오늘 아침에 더욱 확실해졌다.

누군가 훔쳐먹기 전과 후의 딸기 모습


딸기꽃 주변에 뿌려놓은 밀가루가 어제 내린 봄비를 맞고 끈적해졌다.

그. 런. 데....

어젯밤에 사진을 찍어놓은 딸기가 없어졌다. 밀가루에 발자국을 전혀 남기지 않고 딸기만 사라졌다. 가장 예쁘게 잘 익은 딸기였다. 현장을 보는 순간 문득 그동안 내가 신중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스쳤다. 나는 왜 범인이 밤에만 물건을 훔친다고 생각했을까?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는 속담을 왜 흘려 들었을까,


바닥에 족적을 남기지 않은 놈은 날개가 있다. 남기고 간 딸기의 상처에서는 아직도 단물이 배어 촉촉했다. 놈이 딸기를 훔쳐먹은 시간은 새벽, 아니면 조금 전일수도 있다. 더구나 항아리 부분에 먹다가 흘린 자국이 있다. 제법 급했던 모양이다.

새다!

지붕 위 전봇줄 새들이 나란히 앉아서 지저귀고 있다. 멀리 이웃집 안테나 위에  비둘기 한 마리도 나를 지켜보고 있다. 저 중에 한놈은 범인이다. 놈은 참 양심도 없다.


루팡은 절대로 가난한 집 물건은 훔치지 않았다.


다시 화를 찾은 우리 집 옥상정원

    

매거진의 이전글 그깟 꽃구경 내년에 하면 되지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